상처입은 신여성의 진실
  • 강철주 편집위원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4.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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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지음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솔직히 고백하건대, ‘신여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천박한 호기심부터 앞선다. 김동인 소설 <김연실전>의 주인공처럼 겉멋만 잔뜩 든 채 어설픈 성적 방종이나 누리는 이미지가 연상된다. 실존 인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김일엽은 수덕사의 전설로 남은 비련의 여인으로, 윤심덕은 현해탄에서 정사한 비극적 드라마로, 나혜석은 ‘이혼고백장’을 발표할 만큼 전투적인 도발성이 우선 떠오른다. <김연실전>의 모델로 알려진 김명순도 소설 속의 왜곡된 이미지로만 기억된다.

 
신여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1920년대에도 사정은 비슷했던 것 같다. 신여성이라는 존재는 남성 중심적 전통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유탕(遊蕩)에 젖어 있고 낭비에 있고 퇴폐에 있으니 자기 자신으로서는 생활해가기 어려운 젊은이’라는 것이 당대의 주류 사회가 신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근대의 여성’으로서 ‘여성의 근대’를 열기 위해 벌인 그녀들의 고투는 외면하고 한낱 구설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김경일 지음, 푸른역사 펴냄)은 20세기 전반 식민지 조선 사회에 당혹감과 충격을 안겨주며 등장한 신여성과, 그를 둘러싼 백화제방의 담론들과 사회 현상의 의미를 파헤친 책이다. 신여성의 개념 정의와 변천 과정에서부터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에 관련된 신여성의 자기 정체성 문제, 성과 사랑, 유행과 소비, 지식과 교육, 일과 직업 등 여러 영역에 걸쳐 신여성의 실체를 다각도로 분석함으로써, ‘근대와 여성의 만남’에서 발생한 융합과 충돌의 양상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저자에 따르면 신여성들이 제기한 다양한 쟁점들은 남성 중심 사회의 조롱과 멸시, 분노를 야기했다. ‘신여성들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한 성의 다른 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 억압과 좌절, 그리고 상호 불신이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신여성에 대한 악의적 선입견의 뿌리가 그만큼 깊다는 것이다.

물론 신여성에 대한 찬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여성은 모성과 가족의 연장선상에서가 아니라 여성 그 자체로 사회적 관심의 초점이 옮겨가도록 했다는 점에서 한때는 열렬한 숭배와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오, 태양이 낳은 딸들 / 깨어진 문명의 오직 하나인 메시아 / 만인의 애타는 희망이/ 오직 네 신선한 호흡에 있다’(<신여자송>)라고 노래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들은 ‘식민지의 신여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식민성과 근대성이 복합된 교육을 통해 자의식을 획득한 우리 나라의 신여성은 제국주의적 지배와 민족주의적 저항이라는 모순된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현실이 절망적일수록 서양(또는 일본)으로 표상되는 타자에 대한 동경이 더욱 절박해졌다. 그 결과 민족 의식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신여성의 의식과 자아는 분열되고 모순이 심화했다.

저자는 이같은 신여성의 모습을 풍부한 자료와 이미지를 동원해 실감 나게 되살려 놓고 있다. 특히 신여성 연구 자료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신여성> <별건곤> <여성> 등의 간행물에서 찾아낸 글과 그림, 사진 들이 돋보이는데, 독자에 따라서는 저자의 논지 전개보다는 자료 자체를 즐기며 ‘오독(誤讀)의 권리’를 누리는 것이 훨씬 더 흥미로울 수 있다. 맛보기로, 신여성과 모던 보이들이 즐겨 드나들던 카페에 대한 인용문 몇 개를 소개한다.

‘카페는 술과 계집 그리고 엽기가 잠재해 있는 곳이다. 붉은 등불, 파란 등불, 밝지 못한 샹들리에 아래에 발자취 소리와 옷자락이 부벼지는 소리, 담배 연기, 술의 냄새, 요란하게 흐르는 재즈에 맞추어 춤추는 젊은 남자와 여자들의 파득파득 떠는 웃음소리와 흥분된 얼굴!’

‘아이스커피를 두 사람이 하나만 청하여다가는 두 남녀가 대가리를 부벼대고 보리줄기로 쪽쪽 빨아먹는다.’

‘콜롬비아의 29년도 유행가에 (…) 젊은 양복쟁이들이 독주에 취하여 흐느적거리며 이 구석 저 구석에는 에로신이 점점이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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