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시가 하나 된 사랑과 저항의 정서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12.0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남주 시인 10주기 맞아 ‘문학적 재평가’
‘이두메는 날라와 더불어/꽃이 되자 하네 꽃이/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녹두꽃이 되자 하네//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새가 되자 하네 새가/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파랑새가 되자 하네//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불이 되자 하네 불이/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들불이 되자 하네//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다시 한 번 이 고을은/반란이 되자 하네/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으로 꽂히는/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1980년대 민중가요로 만들어져 널리 불렸던 김남주 시인의 시 <노래>의 전문이다. 시인이기보다 전사로 불리기를 원했던 김남주 시인은 “시는 혁명의 무기로 사용되어야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성년이 된 이후 생의 절반 가까이를 감옥에서 보냈던 시인은 자신의 시 4백70여 편 가운데 3백여 편을 옥중에서 썼다. 그리고 그가 원한 대로 그의 시들은 감옥 밖의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아낌없이 ‘사용’되었다.

대학 시절 <창작과 비평>에 실린 김준태 시인의 시를 보고 ‘이런 것이 시라면 나도 쓰겠다’는 엉뚱한 생각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밝힌 김남주 시인은 “창작 기량을 향상시킨답시고 문장론이라든가 수사학이라든가 문예이론 서적 따위를 일부러 읽은 적은 없”었다. 표현 능력, 기발한 발상법, 완벽한 형식 따위가 문학 작품을 생산해내는 기본 요인이라든가 시적 재능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 걸맞게 그의 시에 대한 평가 또한 ‘문학적’보다는 ‘사회적’ 평가가 주종이었다.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뜬 지 10년째. 문단 일부에서 그의 시에 대한 문학적 재평가 작업이 시작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장 염무웅)는 지난 12월3일 서울 정동에서 ‘사랑과 전투의 시인 김남주의 삶과 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심포지엄을 열고, 김남주 시인의 시 세계를 되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정지창 김수이 한성자 이병훈 임홍배 김사인 남진우 황현산 등 생전에 그를 잘 알았던, 혹은 생면부지였던 선후배 문학인들이 모여 그의 시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출옥 후 ‘혁명’ 대신 ‘일상’에 눈돌려

한성자씨(이화여대 강사)는 ‘<진혼가>의 상징 구조를 통해 본 시인의 길’이라는 원고지 100장짜리 논문을 통해 김남주의 초기 시 <진혼가>에 나타난 문학적 알레고리를 집중 분석한 뒤 “그의 시가 모든 다른 저항 시인들의 작품을 물리치고 우뚝 솟아 있는 것은 그의 열렬한 투쟁 정신과 함께 절묘하게 사용된 비유가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문학 평론가 이병훈씨(연세대 교수)는 “매우 비시적(非詩的)이고 격문에 가깝기도 한 그의 시들이 강력한 정서적·예술적 힘을 얻는 이유는 낱말 하나하나, 비유 하나하나가 펄펄 살아서 우리의 느슨해진 의식을 송곳처럼 찔러오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임홍배 교수(서울대·독문학)와 문학 평론가 김사인씨(동덕여대 교수)는 김남주의 시에 담긴 이념의 변천을 놓고 토론했다. 임교수는 “혁명적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던 시인은 출옥 이후 자신이 꿈꾸던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일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가 조금 더 살았더라면 이런 시작 태도의 변화가 의미 있는 결실을 거두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라고 아쉬워했다. 김사인 교수는 “김남주 시의 가장 강렬한 정서는 (적에 대한) 증오심이다. 조심스럽지만, 이제쯤엔 바로 이 ‘증오와 적개심’이 어디까지 정당하며 얼마나 성실한 것인지 점검될 필요가 있다”라면서 이제는 ‘신화’를 벗겨낸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1980년대에 운동권과 거리가 있는 문학 활동을 해온 사람으로서 김남주 시인을 잘 모르지만, 이시영 시인의 부탁으로 발제를 맡았다”라고 밝힌 문학 평론가 남진우씨(명지대 교수)는 ‘혁명의 길 전사의 길’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김남주 시 새롭게 읽기를 시도했다. 남교수는 <잿더미>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진혼가> <파도는 가고> 등 김남주 시에 나타나는 불의 이미지를 가지고 시인의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를 분석했다. 그의 시가 은유나 환유·상징 같은 의미 전환을 가져오는 비유보다 반복·열거·과장·대조·도치 같은 언어적 효과를 노린 비유에 더 의존하고 있는 이유 또한 그가 시를 ‘존재’가 아닌 ‘의미’를 위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용’하기 위해서 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남주의 시는 언어의 명료성과 윤리적 성실성이 만나 이루어진, 우리 시사에서 만나기 힘든 희귀한 정신의 결정체라는 것이 남교수의 총평.

“언어의 명료성과 윤리적 성실성의 만남”

정지창 교수(영남대·독문학)는 김남주 시인이 옥중에서 하이네·네루다·브레히트 등 외국 저항 시인들의 시를 번역했는데, 특히 브레히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분석했다. 가령 ‘증오 없이 나 하루도 버틸 수 없습니다/증오는 나의 무기 나의 투쟁입니다’(<명줄> 부분)라는 김남주의 시와 ‘그러나 분노만이 나로 하여금/당장에 펜을 잡게 한다’(<서정시가 어울리지 않는 시대> 부분)라는 브레히트의 시는 “증오와 분노를 값싼 감상이나 상투적 구호로 소진시키지 않고 선동성과 감염성을 목표로 치밀하게 계산된 미학적 전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닮았다”라는 것이다.

김남주 시인이 데뷔하던 1974년 당시 <창작과 비평>의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그가 투고한 시 가운데 여덟 편을 골라 실었던 문학 평론가 염무웅씨(영남대 교수)는 “흔히 저항 시인 재평가 작업이 서정성 찾기 식으로 진행되는 수가 많은데, 김남주의 경우 그의 시가 갖는 혁명성·실천성을 문학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다행이다. 오늘 발제문에서도 ‘소신 공양’이나 ‘순사(殉死)’라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한 것처럼 김남주의 삶은 그의 시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