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속에 녹아든 슬픔과 분노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4.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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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문화활동 연장’/한국인 작가들도 공동 작업
‘아름다운 세상 만들어 가자,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노동자 쓰러지진 않아, 밟히고 또 밟혀도 다시 일어나/누가 뭐래도 우리는 노동자, 작업 속에도 아름다운 일꾼, 피땀 흘리면서 당당하게 살아갈, 세상을 바꾸는, 한국을 만드는 노동자…’

지난 12월10일 이화여대 대강당, 박노해 시인의 시집 <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 콘서트는 이름 모를 외국인 밴드의 힘찬 노래로 후끈 달아올랐다. 밴드의 이름은 ‘스탑크랙다운’(강제추방 반대). 버마(미얀마)와 네팔 출신의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된 밴드였다. 이들이 부른 는 합법적으로 한국에서 일하고 싶은 바람을 노래한 것이었다.

스탑크랙다운의 공연에 앞서 이주노동자 시인 카엘 레벤은 박노해 시인의 시 <하늘>을 낭송했다. 본명이 아부 카일인 카엘 레벤은 박노해 시인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얼굴 없는 시인으로 활동해왔다. 타고르의 고향 방글라데시에서 온 그는 올해로 한국 생활 8년째를 맞았다. 한국에서 외국인 이주노동자로 살면서 겪은 아픔을 담은 시를 주로 쓴 그는 그동안 ‘이주노동자들의 박노해’로 불려 왔다.

노동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구호와 외침으로 시작된 노동자의 목소리는 시와 노래가 되어 세상에 전해졌다. 박노해의 시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투쟁가로, 혹은 최병수의 걸개그림으로, 오 윤의 판화로 바뀐 노동자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진한 감동을 받았다.

특히 지난 11월까지 1년여 진행된 이주노동자들의 명동성당 장기 농성은 이들의 노동 예술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판 노예제도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외국인 산업연수제도를 폐지하려고 모인 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 때문에 애를 먹었다. 팜플렛을 하나 만들더라도 17개 언어로 만들어야 했다.

노래가 바로 돌파구였다. 교감할 수 있는 노래는 소통할 길을 열어주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과정에서 큰 힘을 발휘했던 한국의 민중 가요가 큰 도움이 되었다. 노래패와 마임팀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고 농성장은 활기를 되찾았다. 사람들을 함께 모을 수 있는 언어가 생기자 투쟁에도 탄력이 붙었다.
마임 팀 ‘전태일’ 등 활약

스탑크랙다운도 이때 만들어졌다. 밴드의 리더 소모뚜 씨(29·버마)는 “밴드가 필요한 것 같아 마음 맞는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했다. <불나비>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불렀는데, 나중에는 함께 따라 부르기 좋은 간단한 노래를 작곡해 부르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여러 노래패가 만들어져 투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마임팀 ‘전태일’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전태일 열사의 이름을 따서 팀 이름을 지은 이들은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3명으로 구성되었다. 지난 12월19일 이들은 세계이주노동자의 날 기념집회에서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머리에 붉은 띠를 묶고 나와 민중 가요 <동지가>에 맞추어 힘찬 율동을 선보였다.

국내 노동자 문예단이 업장 별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이주노동자 문예단은 국가 별로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언어 소통 때문이다. 이주노동자 중에서는 버마·방글라데시·네팔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국내에서 민주화운동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직력을 다졌기 때문이다. 전태일 마임팀의 리더 민 수씨(29·네팔)는 “네팔은 현재 심각한 내전 중이다.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절실하게 투쟁에 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아웅산 수지 여사가 민주화 투쟁중인 버마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가장 열심이다. 버마 이주노동자 공동체에서 스탑크랙다운(보컬 미누는 네팔 출신) 외에도 S2N 밴드와 STAY 마임팀, 그리고 각종 노래패가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운동을 이끌면서 고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있는 뚜루 버마행동 대표는 “문화는 사람과 사람을 묶어주는 끈이다. 고국과 이곳의 활동에 문화적인 힘을 적극 이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 문예단은 작업장이 떨어져 있어 활동에 장애가 많다. 스탑크랙다운 멤버들은 서울 동대문과 구로공단·인천 남동공단·의정부 등에서 떨어져 일하고 있어서 1주일에 한 번, 매주 일요일에 합주실에 나와 연습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기 때문에 이들의 노래에는 힘이 있다. 소모뚜 씨는 “가사는 우리가 직접 쓴다. 우리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써야 한다. 다른 사람이 대신 아파해 줄 것이 아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얼마 전 스탑크랙다운은 불법 체류자 단속이 심해지면서 자살을 택한 동료 이주노동자 14명을 위해 <친구여 잘 가시오>를 작곡했다.
몇 번의 활동을 통해 알려지면서 스탑크랙다운은 팬클럽(cafe.daum.net/stopcrackdown)까지 생겼다. <노동의 새벽> 헌정음반을 제작하며 스탑크랙다운의 녹음을 프로듀싱했던 가수 신해철씨는 이들의 노래에 대해 “한 소절 한 소절에 정성이 배어 있다. 프로페셔널하지는 않아도 대부분 잘 만들어진 곡이다. 얼치기 밴드들보다 훨씬 낫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스탑크랙다운을 제외한 이주노동자 대부분의 문예 활동은 침체기를 겪고 있다. 명동성당 농성단이 해산되고 불법 체류자 단속이 강화되면서 이주노동자 문예단이 대부분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경기북부 이주노동자모임을 이끌고 있는 마슘 씨는 “한국 정부가 이주노동자 운동을 이끄는 사람들을 표적 단속 하고 있다. 특히 노래패나 마임팀 활동을 하면서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 많이 잡혀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다행히 이주노동자들은 최근 강력한 우군을 갖게 되었다. 바로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갖는 작가들이다. 얼마 전 설치미술가 민영순씨는 이주노동자들을 주제로 전을 열었고, 다큐멘터리 감독 주현숙씨는 이주노동자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를 제작해 상영했다.

특히 신진 작가들은 이주노동자들을 단지 관찰자로서 바라보지 않고 그들과 함께 고민하며 다양한 공동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 대학로 마로니에 전시관에서 <20kg의 여행>전을 가진 투쟁과밥·믹스라이스·떼낄라는 이주노동자 문제를 고민하는 대표적인 작가팀이다. 20kg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강제 추방될 때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짐의 무게이다.

한국 사회의 배타성·편협성 비추는 거울

다양한 영상 작업을 통해 이주노동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믹스라이스는 그동안 이들의 자유로운 대화를 담은 비디오 다이어리를 찍어 왔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이주노동자 2명에게 ‘빨리빨리’ ‘설렁설렁 하지마’ ‘야 이 새끼야’ ‘너네 나라 이런 거 있어?’ ‘이거 하고 이거 끝나면 저거 하고, 두개 끝나면 또 저거 해’ 등 한국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로 랩을 만들도록 주문했다. 믹스라이스의 임흥순씨는 “이주노동자는 우리의 거울이다. 그들의 문제는 바로 우리 문제이다. 이주노동자 문제를 통해서 우리의 배타성과 편협성을 들여다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작업하며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이들에게 새로운 투쟁 도구를 제시하고 있다. 걸개그림과 판화 대신 이들이 투쟁 도구로 삼는 것이 바로 영상과 사진이다. 믹스라이스를 비롯해 미디어액트 등에서 이주노동자를 위한 영상 교육을 맡고 있다. 이런 단체를 통해 영상 교육을 받고 농성 장면을 찍고 있는 안도노 씨(27 인도네시아)는 “솜씨는 아마추어지만 나의 시선으로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찍고 있다”라고 말했다.

디지털 사진과 인터넷도 도움이 되고 있는데, 독일인 사회활동가 크리스티앙 칼은 사진 작업을 통해서 도움을 주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때 한국을 찾았던 그는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을 보고 바로 농성단에 합류했다. 그는 이주노동자들의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려 전세계 단체에 알리고 있다.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는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플래시 애니메이션 웹카드를 만들어 인터넷에 배포하고 있다.

예술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인들과 가슴으로 만나고 싶어한다. 이주노동자들이 노래하는 것은 바로 함께 사는 세상이다. 카엘 레벤 씨는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인들이 금반지를 모을 때, 우리는 금반지가 없어서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아픔을 함께했다. 가난한 가족을 위해 철새처럼 희망을 찾아온 우리에게 제발 일할 자유를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주노동자 문제를 이주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문제로 보라고 주문했다.

노동자의 위치가 어디인가
카엘 레벤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시인)

아침의 노을처럼 밝은 당신의 얼굴

인형처럼 고운 당신을 안고 싶은

나에게 두 팔 있다.

당신 입술에

귤 두 쪽을 부드럽게 붙여

맛있게 빨아먹는

나에게 두 입술 있다.

당신의 사슴 같은 눈에

걸어놓는 사랑스러운 편지

그 편지를 볼 수 있는

나에게 두 눈 있다.

당신의 지금 일, 지나간 일, 다가올 일

모두 받아들이는 바다처럼

당신을 받아들일

나에게도 한 마음 있다.

당신이 가장 힘들 때

혹은 기쁠 때

물 위를 함께 건널 수 있는

나에게 두 다리 있다.

그러나 나는 사람 아니다.

아마 나는 사람 아니다.

나는 노동자이다.

어디인가.

노동자의 위치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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