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삶 냉혹하게 그린 연극 <차력사와 아코디언>
  • 이영미 (연극 평론가) ()
  • 승인 2005.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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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력사와 아코디언>, 대중 연극 수준 뛰어넘는 완성도 확보
올연초 연극계만큼 ‘평론가가 볼 만한 작품’이 드문 경우는 십수 년 만에 처음인 듯하다. 올해에는 애초에 작품 수도 적고, 그나마 번역 코미디이거나 ‘심금을 울리는’ 대중적인 작품이 태반이다.

대중극의 존재야 별난 일이 아니지만, 요즘의 신작 창작극 기근은 아무래도 지난해 ‘연극열전’의 여파인 듯하다. 겨울 시즌은 대개 신작 재공연으로 채워지는 법인데, 지난해 내내 연극계 역량이 ‘연극열전’이라는 리메이크 작업에 쏠려 있었던 것이다. 지금 공연 중인 <늙은 부부 이야기> <삼류배우> <차력사와 아코디언> 등은 모두 2003년 이전에 만들어진 레퍼토리다.

지난해 예술상 수상작들의 면면을 훑어보면 지금 우리 연극계의 창작 능력에 대해 다시 한번 걱정하게 된다. 문예진흥원의 ‘올해의 예술상’과 연극평론가협회의 ‘베스트 3’에 오른 작품을 보아도 순수한 창작 희곡을 바탕으로 한 것은 단 한 작품에 불과하다. 대신 외국 연출가와 외국 무대 디자이너가 뻑적지근하게 만들어놓은 체호프의 <갈매기>가 최고작으로 꼽혔다. 우리의 낮은 창작 수준도 걱정이지만, 이런 공백기에 국·공립 단체들이 외국 예술가들의 작품에 기대어 폼을 잡고 있다니. 한국 연극의 미래를 생각할 때 불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길고 긴 ‘연극 한파’ 속에서 <차력사와 아코디언> (장우재 작·연출)을 보고 있으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언뜻 보기에는 심금을 울리는 누추한 부류(<보고 싶습니다> <우동 한 그릇> <눈 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 <늙은 부부 이야기> 등)에 속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작품은 조금 다르다. 극한적 고통, 기쁨과 슬픔 같은 정서적 울림을 가족애나 사랑의 고귀함 등 상식적 가치와 버무려놓은 대중 연극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인식적·정서적 지평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차력을 하면서 키토산을 파는 약장사패라는 소재는 그 자체로 우울하고 절망적이다. 일행의 우두머리 서이사는 떠돌이 생활에 집안이 풍비박산 수준이고, 순박한 차력사 준배는 같은 일행인 양숙을 좋아하는데, 예쁘장하고 일 잘하는 양숙은 연극배우가 되겠다는 꿈에 젖어 <인형의 집> 대사를 연습한다. 지능이 좀 떨어지는 써니는 아무 가치도 없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척하며 몸을 취한 서이사에게 달라붙는다. 병든 노모와 살아가는 농촌 총각은 이들에게서 20만원짜리 키토산을 산다. 그들 누구에게도 희망이란 없어 보인다.

흔히 이렇게 전망 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다루는 연극에는, 돈도 비전도 없는 연극인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연극인들에 대한 연극은 매우 리얼리티가 있을 것 같지만, 대개 과도한 자기 연민과 불필요한 적개심으로 허우적거리는 작품이 태반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찌 연극인들뿐일까? 자신의 삶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보통 사람은 감상주의의 위안을 받고 싶어한다. 그렇게 보자면 약장사패는 딱 좋은 소재가 아닌가.

그런데 이 작품은 다르다. 인간의 구질구질한 삶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징글징글하게 냉혹하다(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박근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박근형의 서울식 ‘쿨함’과 달리 장우재는 전라도 식으로 끈적거리면서 ‘징허다’). 이들은 불가능한 희망으로 자신과 남을 속이며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나 외로워서 연극했던 것 같애’라는 써니의 말처럼 속임수인 줄 알면서도 외롭기 때문에 얽혀 산다.

소리 없는 울음 터뜨리는 염혜란의 연기 ‘압권’

이런 상황은 희망 혹은 절망 같은 단순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왔다가 그냥 가는 벌레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써니나, 속임수와 싸구려가 싫어 떠나겠다는 양숙 앞에서 한번 믿어보라며 식칼로 배를 찌르는 차력사는, 이들의 삶의 동력이 그저 달착지근한 사랑과 아련한 눈물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두 장면은 이 작품의 명장면이라 할 만한데, 특히 굳은살처럼 되어버린 자기 불신의 바닥이 깨어지며 터져나오는, 입을 벌린 채 소리도 못 내고 울음을 터뜨리는 염혜란의 연기는 객석을 압도한다. 이 연극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고 포기해선 안됩니다.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절망해서도 안됩니다. 키토산을 과신해서도 안됩니다. 너무 기대해서도 안됩니다. 다만 다만 우리는 우리는…”. 그리고 그 대사를 배경으로 곧 망해버릴 것 같은 약장사패에 새 차력사로 들어온 농촌 총각이 입에서 불을 뿜는 연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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