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큰 음악’ 살 길 없나
  • 유혁준 (음악 칼럼니스트) ()
  • 승인 2005.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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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 없이 표류…서울시·KBS 교향악단 부활 몸부림
오스트리아 빈과 함께 음악 도시로 명성이 높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방문객이 택시를 타고 ‘필하모니아’라고 말하면 누구나 중심가 네프스키 대로변에 우뚝 선, 현지인들이 ‘발쇼이잘’이라고 부르는 필하모니아 볼쇼이홀 앞에 내릴 수 있다. 전설적인 지휘 거장 예프게니 므라빈스키가 이끌었던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옛 레닌그라드 필)가 둥지를 틀고 있는, 1839년에 완공된 콘서트홀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민에게 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의 존재는 거의 절대적이다. 교향악단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에게 음악을 선사하는 매개체를 넘어 도시를 상징하는 또 다른 얼굴이 되었다.

1998년 8월17일 첫선을 보인 말레이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창단 7년이 지난 지금 말레이시안필은 이미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다. ‘페트로나스’라는 한 기업이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된 완벽한 전용 홀을 지어 주고 아무 대가 없는 지원을 여지껏 계속해오고 있다. 빈필을 비롯한 본고장 유럽 오케스트라와 맞먹는 연간 100회 이상의 연주회를 소화하고 있는 말레이시안필은 이제 수도 쿠알라룸푸르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문화 사절로 국가로부터 최고 대우를 받고 있다. 2001년 첫 내한 무대에서 말레이시안필은 놀랄 만한 합주력을 과시하며 우리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해외 투어 초청받은 교향악단 전무

올해로 교향악 60년을 맞이한 우리의 실정은 어떨까?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서울시교향악단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라. 세계 최정상의 빈필이나 베를린필과 비교할 것도 없다. 한 시즌 전체의 연주회 일정과 레퍼토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말레이시안필에 비해 당장 2월 공연조차 소개되어 있지 않다. 자유 게시판에는 지난해 12월17일 이후 단 한 건의 글도 올라와 있지 않다. 그야말로 서울시민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내버려져 있다.

로린 마젤·요엘 레비·마티아스 바메르트 등 정상급 거장들이 지휘봉을 들어도 서울시향의 음악은 언제나 2% 부족했다. 러시아 출신 마크 에름레르 이후 3년 이상을 상임 지휘자 없이 표류하고 있다. 가까운 일본도 아니고 음악에 관한 한 우리보다 한수 아래라고 여겼던 말레이시아보다 무려 10배 긴 역사를 가진 한국을 대표하는 교향악단의 현주소가 이렇듯 정체 내지 퇴보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독주자는 많아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는 없다는 것이 양악 100년을 훌쩍 넘긴 우리 현실이다. 선진국들은 그 나라, 도시를 알리는 최고의 음악 단체로 일찍이 교향악단을 육성해왔다. 연 2백회 이상의 연주회를 개최하며 전세계를 누비는 빈필이나 뉴욕필은 거대한 기업과도 같다. 하지만 우리 오케스트라는 그간 단 한 번도 해외 투어를 초청받은 일이 없다. 언제나 ‘국내용’에 머물러 있었다.

국내에는 20개가 넘는 국·공립 교향악단이 활동하고 있다. 이 가운데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만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된 전용 연주홀을 가지고 있는 곳은 없다. 각 지자체들이 너도나도 문예회관을 건립하고 있지만 대부분 다목적홀인 데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음향은 엉망인 부실 공사가 태반이다. 연주와 관련된 소프트웨어는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같은 시 산하의 교향악단은 매년 연초가 되면 다른 공연장에서 대관 일정을 잡느라 분주하다. 제대로 운영도 못할 공연장을 지을 바에는 그곳에서 음악을 연주할 교향악단부터 키우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선장 없는 배는 표류하게 마련이다. 서울시향을 비롯해 KBS교향악단, 코리안심포니, 부산시향 등 국내 10여 개 주요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현재 공석인 채 방치되어 있다. 아직도 일반 대기업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단원 처우는 수십 년째 요지부동이고, 외국과 비교하면 너무 초라한 예산도 여전하다. 세계 정상급 협연자나 지휘자 영입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것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으로서 경제 대국을 자부하는 우리 문화의 현주소다.

자금 확보한 서울시향, 초일류 지휘자 물색

서울시향이 법인화한다고 한다. 초일류 지휘자 물색은 물론 공연기획 예산을 파격적으로 올려 23억원으로 책정했다고 한다. 단원 평가도 제대로 이루어질 전망이다. 그동안 여러 잡음을 일으켰던 단원 노조도 이제는 음악적인 능력으로 승부를 걸겠다고 하니 지켜볼 생각이다. 서울시향이 여타 교향악단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크다. 이제부터라도 서울시향은 초심으로 돌아가 이번 기회를 국내 정상 탈환은 물론 세계 무대로 진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KBS교향악단은 지휘자 정명훈씨를 영입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정씨는 침체한 도쿄필을 NHK필에 필적할 만큼의 실력 있는 교향악단으로 키웠다. 그가 고국의 클래식 음악 발전을 위해서 그동안 갈고 닦은 역량을 발휘해 주기를 기대해본다. 고국의 교향악단을 일으킨다면 그의 지휘봉은 더욱 빛날 것이다. 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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