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축제, 정치 잔치로 변질하나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5.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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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기 지자체 지역 행사 잇따라…“단체장 대권 경쟁에 휘말려”
선거가 없는 해인 올해, 정치인들은 숨고르기를 하면서 점수 관리를 위해 문화 예술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문화예술계가 정치 외풍에 시달린다. 대리 정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의 정치화’는 대부분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대통령을 비하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연극 <환생경제>는 예술을 정쟁의 도구로 활용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10·26을 배경으로 한 영화 <그때 그 사람들>도 정쟁의 대상이 되었다. 광화문 현판 교체 역시 정치적 의도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한나라당 대권 주자인 이명박 서울시장과 손학규 경기도지사 역시 문화 예술 프로젝트로 대권 전초전을 치르고 있다. 지금까지의 결과를 놓고 보면 손지사가 시작하면 이시장이 따라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경기도에 영어 체험 마을이 생기니까 서울시가 영어 체험 마을을 만들고, 손지사가 일산에 한류 테마파크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하자 곧 이어 이시장은 한강 중지도에 오페라 극장을 만든다고 선언했다.

손학규 지사·이명박 시장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화예술계에서 특히 염려하는 것은 경기문화재단과 서울문화재단이 양 진영의 대리전을 치르는 것이다. 1997년 설립되어 많은 문화적 성과를 올리며 지방 문화재단의 전범이 된 경기문화재단과 문화 중심 도시 서울의 문화 정책을 주관하는 서울문화재단이 정치 외풍에 휘둘리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참여정부 들어서 지방 문화 예술 진흥을 위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지방 문화재단 설립 붐이 일기 시작했다. 참여정부 이전에는 경기도와 제주도에만 문화재단이 있었지만 2004년 서울시·강원도·인천시가 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밖에도 고양시와 서울 중구와 노원구 등 기초자치단체도 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주로 중후장대한 문화 정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문화재단은 지방 문화 정책의 사령탑이 되었다. 순환보직제로 인해 전문성이 떨어지는 문화관광부 공무원을 보좌해 문화 행정의 수준을 높였다. 지방에 문화재단이 설립됨으로써 문예회관 건설과 지역 축제 창설 경쟁에 머물렀던 자치단체들은 문화 정책 쪽으로 경쟁의 격을 높일 수 있었다.

특히 이인제 지사 시절 설립된 경기문화재단은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설립 초기 출연 기금이 외환위기 기간의 높은 이율 덕분에 빨리 불어나 재단은 2001년에 기금 1천억원을 조성했다. 막대한 재원을 바탕으로 재단은 각종 문화 예술 프로젝트를 의욕적으로 시행했다. 1999년에 기전문화재연구원을 설립해 문화재 발굴 시스템을 갖춘 재단은 2002년에는 재단 부설로 기전문화대학을 설립하고 평생 문화교육 체제를 확립했다.

조성된 기금으로 경기도 지역의 문화 예술 공연을 지원한 경기문화재단은 7년여 동안 꾸준히 경기도 지역의 굿·5일장·전통 건축물 등 각종 문화 예술 지표를 조사해 문화 예술 정책을 세울 기초 자료를 확보했다. 이런 기본 조사를 바탕으로 재단은 경기도의 정체성을 실학 사상에서 찾고 이에 대한 학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경기문화재단의 이런 성취는 후임 손학규 지사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재단이 벌이는 여러 사업을 통해 손지사는 중앙 언론에 자주 드러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경기고와 서울대 재학 시절 연극반에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손지사는 재단의 문화적 성취를 자기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손지사가 이미 만들어진 경기문화재단의 후광을 업은 반면 이명박 서울시장은 서울문화재단을 새로 만드느라 진통을 겪어야 했다. ‘불도저식 행정’이 문화 예술 분야에서는 잘 먹히지 않았던 것이다. 청계천 복원 공사를 하면서 문화재 발굴 조사에 소홀했으며, 세종문화회관 예술인 노조를 건설 노동자처럼 길들이려 했다는 비난을 들었던 이시장은 특히 문화연대 등 시민단체에 미운털이 박혔다.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 선임과 서울광장 조성 등 이시장이 벌이는 문화 사업의 문제점들이 그때마다 번번이 시민단체의 레이다에 포착되어 비난을 들어야 했다. 이시장이 ‘하이서울 페스티벌’을 벌이자 ‘안티 하이서울 페스티벌’로 맞섰던 시민단체들은 그가 앙드레 김 패션쇼에서 곤룡포를 응용해 디자인한 옷을 입고 나오자 ‘하이 이명박 페스티벌’이라고 비난했다. 이시장은 창동 열린극장 개관 공연을 관람하다가 중간에 나간 것이 기자들에게 알려져 비난을 듣기도 했다.
기관장, 좌충우돌식 밀어붙이기 말아야

이시장의 좌충우돌 문화 행정에 대한 비난과 ‘하이서울 페스티벌’ 주관 단체로서 행사에 대한 손가락질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에 서울문화재단은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그러나 ‘문화가 있는 놀이터 만들기 운동’ ‘책 읽는 서울 만들기 운동’ 등 다양한 문화운동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잃었던 점수를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했다. 현재 기금 8백억원을 확보한 서울문화재단은 이시장이 넘긴 숙제를 하나하나 풀어내면서 빠르게 정착하고 있다.

하지만 서서히 안정기로 접어들고 있는 서울문화재단과 조용히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경기문화재단은 내년 6월로 단체장들의 임기가 끝나면 퇴행할 징후를 보이고 있다. 단체장들이 임기가 끝나기 전에 성과를 내기 위해서 문화재단 본연의 사업보다 당장 눈에 드러나는 공연장 건축과 축제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이시장은 사업비가 수백 억원 소요될 오페라 하우스를 한강 중지도에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이밖에도 서울시는 남산골 한옥마을에 전통 국악공연장을 건립(50억원)하고 문화 지역에 소규모 공연장을 건립(50억원)할 예정이다. 이시장이 시정 성과에 얼마나 목말라 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연히 서울문화재단에는 과부하가 걸리게 되었다. 창동 열린극장과 대학로 연습실을 관리하고 있는 서울문화재단은 앞으로 삼청각을 비롯해 여러 시설물들을 위탁 관리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설 관리와 연중으로 확장된 ‘하이 서울 페스티벌’ 등 각종 축제 준비에 치이게 되면 체계적인 문화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 복원·정비(3백76억원), 백남준미술관 건립(2백84억원), 효행원 건립(1백90억원), 경기도실학박물관 건립(1백80억원) 등 대형 사업을 경기도로부터 위탁받아 추진하고 있는 경기문화재단은 지역 축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 9억8천만원을 들여 ‘실학축전’을 열었던 경기문화재단은 올해 82억원을 들여 ‘세계 평화축전’을 열 계획이다.

서울문화재단과 경기문화재단이 단체장들의 대권 대리전을 치르는 데 대해 문화계에서 비난하는 소리가 높다. 경기문화재단의 한 관계자는 “단체장의 행정 성과를 위해 문화재단의 전문 인력이 시설관리팀과 축제기획팀으로 형질 전환되는 것은 문화 행정이 퇴보하는 전형이다. 단체장의 대권 경쟁으로부터 문화재단을 보호할 장치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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