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만에 돌아온 송두율 교수
  • 고제규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3.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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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과 귀국 모두 학문 위한 결단”
지난 9월22일 독일 뮌스터대학 송두율 교수(59·사진)가 마침내 고국 땅을 밟았다. 송교수는 입국 기자회견에서 “감개무량하다. 10시간이라는 비행 시간은 고국을 그리며 기다렸던 37년이라는 역사가 응축된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임종을 못한 아버지 묘소를 가장 먼저 찾고 싶다고 했다.
송교수의 아버지는 처음으로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동경물리학교 출신 송계범 전남대 교수. 송두율 교수는 아버지가 유학하던 1944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1967년 7월15일 그는 독일로 유학 갔다. 그러나 1973년 학교 선배인 김지하 시인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까지 선고받는 등 고국의 암울한 상황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1974년 3월1일 유신 독재 타도를 내걸고 ‘민주사회 건설 협의회’를 만들어 초대 의장을 맡았다. 그때부터 송교수는 정보기관의 요주의 인물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귀국을 꿈꾸었던 그에게 광주 학살은 한국행을 잠정 보류시켰다. 광주 서중학교 출신인 그는 유년 시절 자신이 걸어다니던 충장로가 피로 물든 화면에 충격을 받았다. 1982년 귀국을 미루고 <소련과 중국>이라는 논문으로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흔히 송교수에게는 친북 인사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1991년 방북 이후부터다. 하지만 그는 방북이 학문 활동의 연장이었다고 주장한다. 송교수는 ‘내재적 방법론’을 통한 사회주의 체제 분석으로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아 독일에서는 외국인에게 좀체 주어지지 않는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내재적 방법론이란 선험적인 편견을 배제하고 사회가 표방한 이념과 현실의 간격을 경험을 통해 비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방북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송교수는 친북 인사라기보다는 북한 사회에 대한 내재적 접근론자인 셈이다.

한국에서 온 신문을 너무나 자세히 읽어 부인 정정희씨(61)로부터 ‘당신은 남의 부고까지 읽느냐’는 핀잔을 받을 만큼 그에게는 남한도 연구 대상이다. 그의 이번 방문 역시 또 다른 학문 활동이다. 송교수는 “이번 방문이 내 고민을 한 단계 높이는 체험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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