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한국 경제를 죽이는가
  • 유철규 성공회대 교수·사회과학부 ()
  • 승인 2001.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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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유철규 : 성공회대 교수·사회과학부

달력으로 보면 분명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다가올 또 다른 시간들을 설계할 때이다. 그러나 주위에 아무도 진지하게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아니,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IMF 3년차 증후군'이 실체로 다가오는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극도의 불안감만이 우리를 휘감고 있다.

그래도 때가 되었으니 여러 기관들이 경제 전망을 속속 발표하는 모양이다. 6%라느니 4%라느니 하는 숫자야 그렇다치고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내년 경제성장이 올해의 절반을 겨우 넘는 수준이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100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 양산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제조업은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고, 내수 산업은 위기에 처해 있으며, 선진적인 산업 구조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선전되었던 벤처 산업도 애물이 되고 있다. 은행을 대신할 것이라던 주식 시장은 자생력을 잃고 약간의 외국인 자금만 빠져나가도 휘청거리면서, 오직 외국인 투자가의 은혜로운 손길만 기다리기에 이르렀다. 국내 투자가들이 외국인 투자가의 행태를 무리지어 따라다니는데 한쪽에서는 남아도는 자금이 갈 곳을 몰라 헤매고, 다른 쪽에서는 웬만한 대기업도 자금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깎이기만 하는 임금과 늘어나기만 하는 노동 시간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오는 횡액이려니, 위기 극복에 도움이 되려니 여기고 견뎌왔던 노동자들도 이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정부 정책에 전면으로 반기를 들고 나섰다.


'위험한 복병' 자본 자유화

이런 상황에서 소비와 투자가 늘어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기업들은 투자를 포기하고, 부채가 늘어나고 소득은 회복되지 않은 중·저소득층 가계는 더 이상 씀씀이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정도가 문제이지 내년이 불황일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불황은 호경기와 불경기의 반복이라는 통상적인 경기 순환 차원에 머무르지만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난 3년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져 온 많은 제도적인 변화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효과를 나타낼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제도 변화는 자본 자유화 등 경제를 완전 개방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개방에는 바람직한 부분도 있고 부작용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위험한 경제 상황에서는 부작용이 더 크게 작용할 수 있다. 이미 한국 경제에서 어디에 투자할 것인지, 얼마나 투자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외국인 투자가의 손에 넘어가 있다. 대다수 국내 투자가들은 그들의 결정에 따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투자 결정이 우리 경제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전세계를 상대로 떠도는 외국인 투자가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불황의 강도와 지속 기간은 훨씬 길어질 수 있다. 한국 경제가 다시 회복세를 탈 가능성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외국인 투자가가 본격적으로 투자할 리 만무하며, 이에 따라 회복의 계기도 늦게 찾아올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내년부터는 외환 자유화가 거의 완성됨에 따라 국내인이 국외로 자본을 유출하기가 과거보다 훨씬 쉬워진다는 것이다. 남미 지역이 장기간의 경제 위기를 반복해서 겪고 있는 이유의 한 가지는 경제 수준에 안 맞게 자본 유출을 지나치게 자유롭게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인이 돈을 빼는데 외국인이 투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투자가끼리 서로 눈치를 보면서 기다리는 동안 경제는 계속 침체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외국 자본의 조언에 얽매이고 돈 가진 자의 눈치를 보며, 갖지 못한 자의 희생만 요구하는 방식으로 개혁 아닌 개혁을 지속하다가는 이번 불황이 언제 끝날지 전망하는 일조차도 아주 오랫동안 어려워질 것 같다. 지금은 개혁을 개혁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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