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경영'의 허망한 파산 신고
  • 곽노현 방송대 법학과 교수 ()
  • 승인 2001.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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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이후 3년간 분식 회계 41조원, 불법 대출 10조원, 자금 해외 유출 41억 달러, 해외 불법 차입 1백57억 달러. 지난 2월2일 대검이 발표한 대우그룹의 회계 및 자금 부정 유형과 액수가 이랬다. 설마설마하며 애써 외면해온 의혹들이 사실로 확인될 때, 선의를 지닌 동시대인으로서 느끼는 황당함과 비참함이란!

같은 날 대우의 전·현직 최고 전문경영인 4인이 사기죄와 재산도피죄로 쇠고랑을 찼다. 김우중 회장의 화려했던 성공 시대는 이렇게 비참하고 충격적인 모습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언론 매체에 비친 김회장은 이제 최측근들이 줄줄이 감옥에 끌려가도 나홀로 호화 도피 생활을 계속하며 어딘가에 숨겨놓은 더러운 돈으로 재기를 꿈꾸는 희대의 파렴치범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30년간 봉급생활자들의 우상으로 떠받들어지던 그가 이제는 국민 경제에 막대한 부담과 주름을 안긴 국민의 공적(公敵)으로 인터폴과 '체포조'의 추적을 받는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이로써 김우중 신화가 산산이 깨졌다.

지난 한두 해 사이 섣부른 신화의 자리에서 추악한 현실로 굴러떨어진 최고 경영자는 비단 김우중씨만이 아니다. 군사 독재와 개발 연대의 화신인 현대의 정주영 회장도 이미 탈신격화의 길에 접어든 지 오래다. 무엇보다도 그의 오늘을 있게 한 현대건설이 죽은 몸이나 마찬가지다. 정부의 개입과 지원이 없다면 한시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런 위기에도 아랑곳없이 자식과 가신 들은 갈가리 찢겨 세 차례나 자중지란을 벌였다. 대담한 소몰이 방북으로 간신히 따낸 금강산 사업권마저 적자투성이 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김우중 신화 몰락과 정주영 신화 퇴색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1차적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우선 군사 독재와 개발 연대에서 작동되었던 경영 방식을 더 이상 미화하지 말라는 경고이자 '황제' 개개인의 기질과 상관없이 '브레이크 없는 황제 경영'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교훈이다. 또한 정경 유착과 편법 경영을 주요 방편으로 삼았던 김우중과 정주영식 성공 신화가 붕괴한 것은 앞으로는 이 두 가지 낡은 관행에서 벗어나라는 당부를 담고 있기도 하다. 나아가 이들의 종국적 실패는 최근의 경제 환경이 정주영과 김우중이라는 당대 최고의 기업인마저 한 세대만에 도태시킬 만큼 급변하고 있음을 일러준다.

이런 점에서 관심을 끄는 것이 삼성 신화의 운명이다. 소비자의 뇌리에 삼성제일주의를 주입해온 삼성그룹은 과연 3세대까지 갈 것인가? 다시 말해서 황제 세습이 성공할 것인가? 시중에는 오는 3월중으로 삼성그룹이 이재용씨를 삼성전자 이사로 선임함으로써 승계 작업을 가시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하다.

하지만 이미 삼성 신화에도 커다란 구멍이 난 상태다. 황제 세습을 위해 이재용씨에게 핵심 계열사 주식을 잇달아 초저가로 특혜 발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법적으로 문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도 곱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장기간의 성공 신화를 허용하지 않는 최근의 경제 환경을 감안할 때 황제 세습과 종신 황제의 구태를 재현할 경우 삼성그룹에도 신화로 박제된 과거만 남을 뿐, 아무런 미래도 없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이야말로 황제 경영·전횡 경영·편법 경영이 재앙의 진원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때다. 이것이 김우중과 정주영이 정점에 서 있었던 개발연대식 성공 시대의 종언이 주는 교훈이다. 이 평범한 교훈을 존중하지 않는 기업주에게 화(禍)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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