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왜 존경받는 부자가 없나
  • 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 ()
  • 승인 2001.03.1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IMF 사태로 혼쭐이 났는데도 재벌의 세습 경영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이제는 재벌의 소유·지배 구조를 개혁해, 유능한 전문 경영자가 책임지고 경영하는 '책임 전문 경영 체제'를 하루빨리 실현해야 한다.

ⓒ이건모 그림

부시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보수 색깔을 드러낸답시고 상속세·증여세 폐지안을 마련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방안에 대찬성할 것 같은 갑부 100여 명이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범죄와 마약에다 빈부 격차가 심각한데도 미국 사회가 버티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노블리스 오블리제(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가 있기 때문이리라.

또 미국의 대기업 총수들은 자식에게 기업 경영을 승계하지 않는다. 철강왕 카네기도 그랬고, 빌 게이츠도 100만 달러를 자식에게 물려주기로 했을 뿐이다. 이들은 스스로 부자란 '사회적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사회 의장인 포드 4세와 같은 예외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독자성을 갖는 최고경영자가 따로 존재한다. 가족의 기업 지배가 꽤 남아 있는 유럽에서도 소유·지배와 경영은 분리되어 있다.

구미의 기업 체제가 이렇게 된 것은 오랜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의 깨달음 때문이었다. 기업, 특히 대기업은 수많은 이해 관계자의 재산이며, 또 유능한 인물이 경영을 맡아야 발전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일본에서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재벌 해체를 통해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그리고 그 이후 성장한 혼다와 같은 기업은 창업자 가족이 아예 간부 직에 앉을 수 없게 해 놓았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IMF 사태로 혼쭐이 났는데도 재벌의 세습 경영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삼성의 3세 총수는 갖가지 불법적이고 변칙적인 수단으로 수조원의 재산과 기업 지배권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랐는지 이제 기업 경영 일선에 나설 모양이다. 현대에서는 거창한 3부자 동반 퇴진 선언이 어설픈 쇼로 끝나고 말았으며, SK의 2세 총수 일가는 순환 출자와 부당 내부 거래라는 '땅 짚고 헤엄치기' 수법으로 그룹 지배권을 구축한 다음 경영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사실 재벌 체제의 핵심 문제는 쉽게 이야기하자면 '생물학적' 문제이다. 즉 어떤 인간의 능력이 죽을 때까지 지속될 수는 없으며 경영 능력의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재벌의 왕조적 독재 체제와 상충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2, 3세 총수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기업 경영에는 이리저리 부딪치는 경험과 창조적 발상을 끌어내는 피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2, 3세 총수는 어느 날 갑자기 회사 경영을 떠맡으니 그 기업이 잘될 리 없다. 이들은 또 2세 콤플렉스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다. 부모 잘 만나서 사장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강박 관념 때문에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큰 일을 저지르곤 한다. IMF 사태 당시 망했거나 어려워진 재벌 중에 이런 예가 적지 않다. 2, 3세는 경영자가 아닌 대주주 지위에 만족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은 것이다.

물론 식당이나 중소기업이라면 주인이 챙기고 앉아 있는 것이 중요하리라. 그렇지만 중소기업에서도 2세 경영은 태반이 실패한다. 그런데 복잡다단한 대기업 경영을 2, 3세가 맡으니 위태롭지 않겠는가. 또 대기업은 중소기업과 달리 총수의 지분이 얼마 되지 않으므로 엄연한 국민의 재산이다. 사장 자리에서 업적을 쌓아 경영 능력을 검증받겠다고도 하지만, 망해 버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다. 경영 능력 검증은 일반 사원과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시키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다.

암담하고 완고한 재벌 체제에 절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다행히 미래산업의 정문술씨처럼 총수 스스로 각성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확산하고 재벌의 소유·지배 구조를 개혁하여 유능한 전문 경영자가 기업의 여러 이해 관계자에게 책임지고 경영하는 '책임 전문 경영 체제'를 하루빨리 실현해 보자.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처럼 존경받는 부자가 생겨나야 하지 않겠는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