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상실증
  • 문정우 편집장 (mjw21@sisapress.com)
  • 승인 2004.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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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 ‘기억 상실증’이라는 비현실적인 소재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도피처를 찾고 싶은 현대인의 심리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재벌 2세,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증. 우리 나라에서 텔레비전 드라마가 성공을 거두려면 반드시 버무려넣어야 하는 3대 요소이다. 프로듀서나 작가는 진부한 소재인 줄 뻔히 알면서도 시청률을 의식해 번번이 이것들을 끌어다 쓴다고 한다.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다가 지난주 종영한 SBS의 <파리의 연인>은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타이완·홍콩 등을 휩쓸다 일본마저 정복한 한류의 대표 드라마 <겨울연가>도 기억상실증이 줄거리의 기둥이었다. <올인> <천국의 계단> 등 화제를 뿌렸던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은 예외 없이 기억을 잃어버리고 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벌 2세가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재벌 2세를 등장시키다 보면 ‘불가피하게’ 출생의 비밀도 끼워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기억상실증일까.

의학적으로 드라마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선택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예는 거의 없다고 한다. 주변에서 암이나 백혈병 걸린 사람은 보았어도 ‘필요한’ 부분만 잊어버리는 기억상실증 환자를 본 일이 있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기억상실증이라는 비현실적 소재에 열중하는 것일까. 아마도 잊고 싶고, 되도록 피하고 싶은 일의 홍수 속에 살다 보니 기억상실증이라는 도피처를 찾게 되는 것이리라.

실제로 요즘 우리 사회를 옥죄는 문제들은 하나같이 무겁고 괴롭다. 내수 침체는 끝을 모르고 유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른다. 세계 원자재의 블랙홀인 중국이 계속 원유를 빨아당기면 석유값은 앞으로 도대체 얼마나 더 뛸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이런 와중에 과거 청산 문제를 둘러싼 전운은 짙어만 간다.

국제 정세도 날로 험악해져 간다. 민족주의에 취한 중국은 패권주의의 길로 들어섰고, 미국은 독립하려는 타이완과 손잡고 양안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탈북자가 동남아를 거쳐 대거 입국한 뒤 북한의 태도는 도로 냉랭해졌다.

한국은 그 틈바구니에서 국익을 위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최선인가. 독도 영유권과 고구려사 왜곡 문제를 놓고 일본이나 중국과 어느 선까지 겨루어야 하는가. 나아가 이라크 파병은 계속 고집해도 좋은가. 미국 대선에서는 누가 이기는 게 유리할까.

나는 누굴까? 생각이 잘 안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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