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 상태의 균열
  • 문정우 편집장 (mjw21@sisapress.com)
  • 승인 2004.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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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그만하고 경험도 풍부한 우리 사회 원로들이 어쩌면 그리도 세상일을 단순하게만 바라볼 수 있는지 부럽기까지 하다.
거대한 보잉747기가 거짓말처럼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 가서 꽂히던 장면이 눈에 선한데 벌써 9·11 3주년이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세상의 어떤 석학도 도대체 백주에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혹자는 문명충돌론을 얘기하고, 혹자는 미국의 음모론을 제기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 처음 벌어진 이 대사건의 원인은 아직 불명이다.

돌이켜보면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역사학자들은 20세기에 일어났던 큰 사건의 진상도 대부분 규명하지 못했다. 유럽인들은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하던 1914년 영문도 모른 채 1차 세계대전에 휘말렸다.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결과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제공한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 역시 불명확하다. 수많은 역사학자들의 수고를 통해 인류가 알게 된 것은 민망할 정도로 소소하다.

국제 정치사뿐만 아니라 경제사도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1920년대에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세계를 초토화한 대공황이나 1987년 10월의 뉴욕 증시 대폭락 원인도 분명치 않다. 한국 역시 불가해라는 덫에 걸려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한국이 왜 갑자기 IMF에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이다.

인류에게 왜 이렇듯 느닷없이 파국이 찾아오는가에 대한 해답을 최근 내놓기 시작한 것은 뜻밖에도 물리학자들이다. 물질계에서 별것 아닌 원인에도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여 격변할 수 있는 상황을 임계 상태라고 하는데, 현대 물리학자들은 인류가 현대에 들어와서는 항상 이런 임계 상태에 있어 왔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고 없는 재앙이 인류를 덮친다는 논리이다. 요즘 역사학계에서는 물리학 이론을 받아들여 역사를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한다.

최근 국무총리까지 지낸 분들을 포함한 원로 1천여명이 현시국에 대한 성명을 냈다. 그 분들에 따르면, 청년 실업과 외화 도피, 이민 열풍까지도 노무현 대통령과 그를 보필하는 386 보좌진 탓이다. 나이도 그만하고 경험도 풍부한 분들이 어쩌면 세상 일을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수 있는지 부럽기까지 하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불길한 일들이 임계 상태에서의 균열이 아니라 그렇게 ‘사소한’ 데서 비롯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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