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영 현상
  • 문정우 편집장 (mjw21@sisapress.com)
  • 승인 2005.01.3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국의 사회학자 엘리스 캐시모어는 어떤 사회가 비정상이다 싶을 정도로 스포츠에 열광한다면 그것은 두 가지 경우라고 설명한다. 그 사회가 지나치게 안정되어 있거나, 매우 불안정하거나.

이를테면 프로 축구라면 죽고 못 사는 유럽은 전자의 경우이다. 정치 경제 사회가 빈틈 없이 잘 짜여 있는 유럽에서 인간이 동물적 공격 본능을 발산할 통로는 스포츠밖에 없다. 고도로 정비된 시스팀에 의해 통제를 받으며 숨막혀 하던 유럽인들은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흉포한 훌리건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중남미 사람들이 축구에 매달리는 것은 또 다른 이유에서다. 이들은 사회가 너무나 불안해 축구말고는 어디 한 군데 마음 붙일 데가 없는 것이다. 국가와 정당, 노조와 언론, 학교 같은 사회의 중추 기능이 타락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축구에 더욱 열광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나라 국민들은 정치 지도자나 엘리트 집단보다는 스포츠 스타를 믿고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 브라질의 펠레나 파라과이의 칠라베르트 같은 축구 영웅이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박주영(사진)이라는 걸출한 청소년 축구 스타가 요즘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카타르 8개국 초청 친선축구대회에서 4경기에 출전해 무려 9골을 잡아낸 박주영 선수는 골 결정력에 한이 맺힌 한국 축구팬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이 청년에게 보내는 열광은 좀 지나친 감이 있다.

결승전이 오전 1시45분에 시작해 3시30분이 다 되어서야 끝났는데도 텔레비전 시청률은 이례적으로 10%대를 기록했다고 한다. 우승 소식이 다음날 텔레비전 9시 뉴스 첫머리와 일간지 주요 면을 장식한 것도 이채로웠다. 카타르 대회가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은 대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카타르 대회가 열리는 동안 이기준 교육 부총리의 후임을 정하지 못해 갈팡질팡하던 정부가 내놓은 것은 김진표라는 낡고 ‘생뚱맞은’ 카드였다. 기아차 노조는 일자리를 팔아먹었고, 학교 선생님이 제자의 시험 점수를 조작해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고 보면 박주영 선수에 대한 과도한 애정 표현은 유럽형이 아니라 남미형인 셈이다. 하기야 지난 월드컵 때는 히딩크 감독을 대통령으로 삼자는 얘기가 제법 ‘심각하게’ 오갔었잖은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