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손가락 지문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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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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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의 수족관에 가고 싶다. 지중해성 햇빛을 즐길 수 있는 그 곳에 가서 한여름 짐승처럼 잠을 자고 싶다. 그러려면 돈을 모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을 즈음에 내년부터 미국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은 지문을 찍어야 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지문이라니. 인권 침해라는 비판이 즉각 나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몇해 전에 일본이 재일 동포에게 지문 날인을 요구했었다. 그러자 우리 정부는 즉각 인권 침해이므로 철회해야 한다고 거세게 항의하였다. 그럼 우리 나라는? 놀랍게도 중범죄인처럼 나의 모든 지문은 이미 국가에 등록되어 있다. 미국이나 일본은 외국인에게만, 그것도 엄지의 지문만을 요구한다. 이에 반해 우리 나라는 열 손가락 지문을 모두 찍는다. 그렇다면 정부는 국민 모두를 잠재적 범죄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인가? 외국에 대해서는 인권 침해라고 강력히 항의하거나 반감을 표하면서 왜 자국 내의 인권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열 손가락의 지문은 주민등록증을 발급할 때 찍게 되어 있다. 한 번에 성공했을 때 괜히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기억이 난다. 주민등록증이 먼저 나왔다고 친구들에게 으스대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주민등록증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한마디로 국가가 국민을 관리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개체를 관리할 때 가장 편한 방법은 번호를 매기는 것이다. 창고에 물건이 많이 있다고 하자. 출납을 파악하기 위해서 가장 편한 방편은 물건 하나하나에 고유 번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바로 창고의 물건처럼 고유 번호가 부여된 하나의 관리 대상이다. 아주 가끔 경찰이 불심 검문을 한다. 그런데 먼저 물어보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주민등록번호이다. 번호를 대면 단말기에 입력한 후 회신이 오면 이름을 되물어 확인한다. 내 이름은 번호에 붙어 있는 잉여물이다. 군대에서도 군번이 나의 이름보다 언제나 앞섰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의 상의에는 이름이 아닌 번호가 새겨져 있다.번호는 개성을 앗아간다. 나의 몸과 정신이 번호 속에 파묻힌다. 왜 우리는 번호를 아무런 거부감 없이 수용하고 있는 것일까? 목장의 소에게 낙인을 찍듯이 국가가 우리에게 번호를 찍어주는데도 왜 아무 말이 없을까? 아무래도 국가주의·전체주의 문화가 우리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요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이 문제되고 있다. 역시 인권을 침해할 위험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수백 개에 달하는 항목에 입력되는 정보가 유출될 경우 심각한 인권 침해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한 여론조사는 80% 이상의 국민이 이 제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했다. 지금도 주민등록번호로 모든 것이 관리되고 있는데 뭐 그 정도 가지고 호들갑을 떠느냐는 무의식 때문이 아닐까.

최근에는 유시민 의원이 <애국가>에 대해 시비를 걸었다. 역시 개인의 존엄을 이유로 내세웠다. 즉, 프로 야구 시합에서까지 <애국가> 연주는 지나치다는 것이다. 물론이다. 그러나 ‘열 손가락 지문도 찍는 나라에서 그 정도야 뭘’ 하는 무의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병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일 뿐이다. 문제의 뿌리에는 국가가 국민을 관리 대상으로 여기는 국가주의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일련의 고유 번호 부여는 국가주의 시스템을 가동하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불가결한 요소가 된 지 오래이다.

고유 번호 없이 국가를 건강하게 이끌어갈 수 있어야 개인의 인권이 보호되는 선진국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하지만 주민등록증도 없고 이름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이사 가도 전입 신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된다면 나는 불안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문화의 유산이 아니겠는가. 벗어날 수 있을까? 매트릭스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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