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자율 그리고 검찰
  • 조선희 (소설가) ()
  • 승인 2003.08.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는 권위주의 시대에 권위적인 아버지, 권위적인 교사 밑에서 자란 세대다. 권위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면서 어른이 되었고, 이제 탈권위주의·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성장 환경이 이렇다 보니, 성인이 된 우리 세대는 아직도 민주 사회에서 권한을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하는 문제, 즉 시민 사회의 규칙과 관련해서는 대단히 미숙하다.

자녀 교육 문제도 그렇다. 우리는 성장기에 가장 결핍했던 것이 자유였기 때문에 자식에게는 그것을 충분히 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다음 세대에게 옳은 처방인가 묻고 싶다. 민주주의 시대에 태어난 우리 자식들에게는 자유만큼이나, 아니 자유보다도 더, 자유를 누릴 자격과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닌가. 자율이란, 보편 타당한 기준을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일이고, 권위에 복종하는 것보다 더 까다로운 일이며, 따라서 훈련이 필요하다.

신나치의 상당수가 68세대의 자식이라 한다. 유럽 사회에 좌파운동과 성해방 물결을 일으킨 바로 그 68세대의 자식들이 신나치에 투항했다는 사실은 대단한 아이러니이지만, 이해할 수 있다. 68세대는 나치 세대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들이 권위주의에 극도의 혐오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을 수 있다. 남녀 혼숙 공동체를 만들고 결혼 제도를 거부하는가 하면, 동성애 취향을 거리낌없이 공개했던 데서도 드러난다. 그런 만큼, 이들은 아이들을 철저히 자유롭게 키웠다. 독일 신세대가 신나치에 투항하는 데는 더 복잡한 정치·사회적 배경이 있겠지만, 자유로부터의 도피, 과도한 자유로 인한 불안, 또는 민주주의를 포식한 뒤의 구토라는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의 한국 사회를 보면, 자유와 자율에 대한 서로 다른 기준들의 일대 전쟁이다. 자유와 자율은 노무현 정부의 캐치프레이즈다. 가령 청와대에서 정부 부처를 근접 관리해온 수석실들을 폐지했고, 검찰 수사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천명했으며, 여당에 대해 일정한 거리 두기를 진짜로 실천하는 것 같다. 입법·행정·사법 분립 원칙이 사전적 의미 그대로 실현되는 중이다.

문제는 입법부·사법부·행정부, 또 언론과 기업과 노동계 등 다른 분야들에서도 그만큼 적극적으로 자유와 자율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시민 사회가 그런 가이드라인에 걸맞게 성숙했는지, 자신의 자유를 계속 지켜낼 만큼 절제할 줄 아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스럽다.

법무부장관은 지휘 감독권 제대로 행사하나

가령 검찰만 해도 그렇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검찰이 소환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대통령의 검찰 독립 및 수사 불개입 원칙이 거듭 천명된 바여서, 만일 청와대에서 일선 검사에게 전화라도 건다면 정치 스캔들이 될 판이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권 행사가 절대적으로 공정하고 충분히 타당한지 의구심이 인다. 검찰 수뇌부 역시 전형적인 권위주의 시대의 자식들이다. 부장검사 이상의 간부 집단은 대체로 군사 정권 시대에 학교 교육을 받았다. 또 검찰이 정치의 시녀라고 불리던 시절에 검찰 수습을 했다. 그들 역시 자유를 갈망했던 세대이고 이제 그것을 최대한 누리고 있지만, 그들에게 자율에 대한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대북 송금 특검을 관철하고 나서 한나라당은 거듭 ‘성역 없이 수사하라’고 촉구했지만, 법무부장관 인사와 검찰 인사 파동 이후의 검찰을 보면 마치 ‘성역에 대한 표적 수사’를 하는 것으로 비치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또한 검찰이 국가나 민족 문제 앞에서, 가령 한반도 긴장 완화 전략과 위법 시비가 충돌했을 때, 스스로 어느 정도 균형을 잡아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정몽헌 회장의 투신도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지만, 가령 그런 것이 검찰 수사권 독립과는 별개로, 법무부장관의 지휘 감독이 필요한 대목으로 보인다. 장관은 과연 검찰 수사에 대해 지휘 감독권을 제대로 행사하고 있는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