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의, 민초를 위한 잔치
  • 오한숙희 (방송인) ()
  • 승인 2003.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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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하나가 된다는 의미의 대동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 속에 존재해 왔다. 대동제가 중요한 이유는 흔히 갈등 해소와 연대 확인이라고 한다.”

개천절을 앞두고 요새 나는 열심히 화투 그림을 그리고 있다. 두어 달 전, 몇몇 사람과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하늘이 열린 날이라는 개천절에 평범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잔치마당을 펼치면 어떻겠느냐’는 말이 나왔다. 그런 날들은 지금껏 국가적인 기념 행사가 있을 뿐 관계자 외에 속하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저 하루 노는 빨간 글씨 날에 불과한 것이었다.
월드컵 때 보았던 우리네 민초들의 열기와 신명에 대한 기억은 한판 벌이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만장일치를 이루어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사람들이 부담 없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놀 수 있는 잔칫날이 없었다. 식민지와 독재 정권으로 점철된 역사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을 범죄시해 왔고, 이른바 문민 시대가 열린 이후에도 사람들이 모였다 하면 그건 거의가 시위인 고로 길이 막히는 짜증과 늘어선 경찰들이 연출하는 공포 분위기를 느낄 뿐이었다.

모두에게 열린 잔치마당을 준비하며

장소는 서울 시청 앞으로 정하고, 특정한 주최측 없이 입소문으로 누구라도 원하면 동참할 수 있게 하기로 했다. 입장료도 없고 초청장도 없애, 가족이나 친구들과 모여서 부담 없이 놀러 나올 수 있고,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잔치마당에 들어설 수 있게 하기로 했다. 주 5일제 근무의 금토일 연휴는 돈 있는 사람들에게는 꿈과 낭만의 황금 같은 시간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 사람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에 젖어서 보내야 하는 기나긴 터널이 아닐 수 없다. 여행은 그만두고 네 식구가 하다못해 가까운 놀이공원에 가려 해도 입장료에 이용권 표값에 간단한 외식비가 웬만한 집 한달 식비의 20%를 차지하는 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크게 하나가 된다는 의미의 대동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 속에 존재해 왔다. 대동제가 중요한 이유는 흔히 갈등 해소와 연대 확인이라고 한다. 같이 밥먹고 술 한잔 하고 2차로 노래방까지 뛰고 나면 갈등 있던 인간 관계들이 원만해지는 경험만으로도 수긍이 간다.

아프리카에는 종신추장제와 세습제를 가진 원시 부족이 있었는데 저항 세력의 시위 한번 없었다고 한다. 친위 부대도 없이 그 대단한 독재를 유지한 비결이 다름아닌 카니발, 대동제였다. 1년에 한 번 있는 대동제날 추장은 도망가 숲에 숨는다고 한다. 취기가 오른 부족민들이 평소 추장에 대해 가지고 있던 억하심정들을 그 날 고스란히 표출하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이 아니니 우리의 대동제가 이렇게까지 될 리는 없지만 아무튼 오늘날 우리에게는 민초들의, 민초들에 의한, 민초들을 위한 대동제가 없다. 국회와 지방의회가 못다하는 ‘소통’을 펼 수 있는 대동제를 잃은 지 오래되었다.

막상 잔치판을 벌이기로 하니 대의 명분으로 삼을 만한 것이 새록새록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명감마저 안게 된 우리는 이 민초들의 화려한 잔칫날을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유니버시아드 개막제만큼 멋들어지게 꾸며야 한다는 옹골찬 야망을 품게 되었다. 화려하고 친근감 있기로 화투장 만한 것이 없을 테니 그것으로 카드섹션을 하자는 의견에 따라 나는 화투 그리기 작업조에 투입되었다.

미대를 졸업하고도 생업과 살림에 매여 못다 핀 꽃 한송이로 살던 민초 예술가들과, 자신에게 예술가적 기질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온 갑남을녀들이 모여 화투장을 그리며, 술술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울기도 하고 남을 웃기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결리지만 즐겁기만 한 것은 왜일까. 제 호주머닛돈 털어서 종이도 사고 물감도 사야 하는데 뿌듯하기만 한 것은 왜일까.

역사의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어 볼 꿈조차 꾸지 못했던 우리가 눈치 보지 않고, 동원당하지 않고, 우리가 신날 수 있는 일을 우리 손으로 마련해서 당당히 잔치를 벌이는 그날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시청 앞, 손잡고 노래하며 어깨걸고 춤추는 그날, 평범한 사람들 속에,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새 하늘 새 땅이 열리기를, 잔칫날을 잡아놓고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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