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또, 사정을 한다지만
  • <시사저널>정치ㆍ경제부장 ()
  • 승인 2000.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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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권의 '실패한 시도'가 남긴 교훈은 권력 기관이 주도하는 1회성 사정으로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부패 중독증을 치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이들이 (중독에서 헤어나기를) 포기하는 이유는, 비참한 삶을 받아들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계속해서 시도하는 노력들이 항상 실패할 때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윌리엄 그라서 저 <긍정적 중독>에서




중독은 무서운 질환이다. 그것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서서히, 마지막 순간에 이를 때까지 파괴하고서야 물러간다. 한번 걸려들면 웬만한 의지와 끈질긴 노력이 아니고서는 헤어나기 힘든, 무시무시한 수렁이다.
도박이나 마약보다 중독성이 덜하다는 술 담배만 해도 그렇다. 연말 연시마다 많은 중독자가 금주·금연을 결심하고서는 이 사실을 공표한다. 이런 연례 행사에 워낙 익숙해진 주변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갖는다.

그러나 오랜 세월 뿌리 내린 중독의 힘은 한순간의 기특한 결심보다 훨씬 강한 법.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던 순간 담뱃갑을 구겨 던진 이가 새해 연휴가 채 끝나기도 전에 꽁초라도 찾으려고 쓰레기통을 뒤지는가 하면, 금주 결심을 이끌어낸 수많은 실수담을 깡그리 잊어버린 술꾼은 술 마실 명분과 건수를 끝내 찾아내고야 만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끝나는 일이 거듭될수록 당사자는 더욱더 중독 물질에 의존하게 되고, 주변에서는 점점 그의 말을 믿지 않게 된다.

이런 악순환 구조는 사회적·집단적 중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을 비롯해 역대 정권은 늘 단호한 의지로 부정 부패를 척결하겠노라고 공언했다. 어느 정권이나 할 것 없이 부정 부패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미래가 없다는 문제 의식만큼은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마치 중독자들이 스스로 건강에 위협을 느껴 금주 금연을 결심하듯이.

하지만 중독자의 선언이 대개 그러하듯이, 정권의 부패 근절 선언도 늘 구두선에 그쳤다. 심지어 서슬 퍼런 기세로 공직자 재산 공개를 단행한 김영삼 정권마저 장학로 청와대 부속실장과 차남 현철씨 스캔들을 거치면서 민주계 자신이 중증 중독자라는 부끄러운 사실만 입증하고 말았다.

IMF 체제에서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부패 척결을 민족의 생존이 걸린 문제로까지 받아들였지만, 부패 중독증을 치유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증세가 더 심각해지고 환부가 더 커졌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검은돈이 활개치는 영역은 더 넓어지고, 그 수법은 더욱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부패 중독자들의 연령대가 점점 내려가는 심상치 않은 징후마저 나타나고 있다. 최근 잇단 대형 대출 비리 사건의 주인공들은 닳고 닳은 기성 세대가 아니라, 새로운 경영 마인드로 무장했다는 젊은 벤처 사업가였다. 그들은‘어떻게든 줄을 잘 잡아 금융기관 돈을 잘 끌어 쓰고, 그 돈으로 로비해서 또 돈을 끌어다 사업을 확장하는’선배들의 부패 행태를 그대로 본떴다(선진 경영 기법이라는 버전업된 수법을 첨가하기는 했지만). 썩은 기업 문화를 바꾸어야 할 프론티어 기업인들이 앞다투어 부패의 늪에 몸을 담글 만큼, 우리 사회의 부패 중독증은 중증에 이르른 것이다.

그래서 당국은 다시, 또, 사정을 한다고 한다. 공무원 사회에서는 벌써 몸을 움츠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음주 단속에 재수 없는 놈이 걸리듯, 공직자 사정 기간에 운 없게 걸릴 수 있기에. 그러나 때마다 들었던 레퍼토리여서 국민들은 정부의 높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라서가 지적했듯이 거듭된 실패로 인해 포기 상태에 빠진 탓이다.

역대 정권의 ‘실패한 시도’가 남긴 분명한 교훈 하나는 권력 기관이 주도하는 1회성 사정으로는 우리 사회의 고질인 부패 중독을 치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선 그들 자신이 중증 중독 집단의 일부일 뿐더러, 중독은 처벌이나 단속만으로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병리 현상이기 때문이다.

청와대나 검찰이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부패를 해결할 수 없음을 시인하는 자기 고백, 그것이야말로 중독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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