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침묵과 정부의 침묵
  • 김상익 (kim@sisapress.com)
  • 승인 2000.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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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환경이 어려워진 지금 기업과 국민에게 어려운 선택을, 그것도 빨리 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정부라면, '자기문제'에 대한 선택도 신속히 내려야 할 것 아닌가.
생각하는 인간, 도구 만드는 인간, 놀이하는 인간…등등 인간을 규정하는 말은 많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면 어떨까. 선택하는 인간.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니 하루에도 열두 번씩 무언가를 선택하며 살아간다. ‘루비콘 강을 건넌’ 시저의 선택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하지만, 선택이라는 고난도 행위는 정치인이나 군인, 기업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하다 못해 코흘리개가 구멍가게에서 과자를 살 때도 매우 진지한 선택 과정을 거친다.

뉴스를 취급하는 기자들에게 선택은 피를 말리는 행위다. 어떤 소재를 어떻게 취재할지, 얼마만한 크기로 보도할지, 도대체 취재한 내용이 보도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 과정에서 이따금 ‘사고’가 발생한다. 최근의 사례로 이정빈 외교통상부장관의 ‘술자리 발언’ 사건이 있다.

이정빈 장관은 지난 10월23일 저녁 출입 기자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의 신체 부위에 대한 ‘농담’과 음담패설에 육박하는 여성 비하 발언이 튀어나왔다. 당시 이 내용은 언론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미디어 오늘>의 보도에 따르면, 우리 언론은 이장관의 발언 내용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지만, 사석에서 나온 ‘농담’이었고 자칫 한·미 간에 외교 마찰이 빚어질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려해 이를 기사화하지 않았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11월2일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가 그 날의 발언 내용을 낱낱이 공개함으로써 현장에 있었던 출입 기자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 후 극소수 언론이 이 문제를 보도했으나 언론계 전체는 침묵을 선택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기서 나도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는데, 2주 전에 발행된 <시사저널> 제577호 뉴스메이커 지면에 관련 기사를 게재하면서 사실 내용을 정확히 보도하지 않는 엉거주춤한 태도를 선택했다. 그때의 판단 기준 역시 입에 올리기 거북한 ‘농담’을 활자화하는 데 따른 부담감과 ‘외교 마찰에 대한 우려’였다. 그 결과 <오마이뉴스>를 접하지 못한 독자들은 도대체 이장관이 무슨 말을 했기에 그처럼 호들갑을 떠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할 일이 발생한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농담’의 내용을 까발리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선정적 보도라는 문제와도 맞물려 있기 때문에 아직도 선뜻 판단하기 쉽지 않지만, 외교 마찰에 대한 우려는 아무래도 지나친 배려였다는 자괴감을 피할 수 없다. 우리 언론이 제아무리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해도 일단 인터넷에 뜬 이상 미국 국무부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장관의 술자리 발언 내용을 모를 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외교 마찰에 대한 우려’는 결과적으로 외교에 대한 우려였다기보다는 국내 문제에 대한 배려였다는 오해를 사도 할 말이 없게 된 셈이다.

아무튼 침묵을 선택한 데 대해서는 언론계 내부에서도 찬반 양론이 무성하다. 국민의 알 권리와 국익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 하는 문제는 언론이 숙명적으로 안고 있는 고민거리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보도 원칙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 사건은 새삼 깨우치게 해주었다.

그런데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언론에 고민스러운 선택지를 덥석 안겨준 당사자의 선택이다. 나라의 외교를 책임진 사람이 외교 마찰을 우려할 만한 발언을 해서 문제가 벌어졌다면 과연 그가, 체면이 있지, 정상으로 외교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할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 외교의 일부분에 공백이 생겼다는 말일 텐데, 그에 대해 정부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어떤 선택을 취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모양 좋게 일을 처리하겠다, 이런 말로 얼버무리고 싶겠지만, 경제 환경이 어려워진 지금 기업과 국민에게 어려운 선택을, 그것도 빨리 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정부라면, ‘자기 문제’에 대한 선택도 신속히 내려야 할 것 아닌가. 벌써 한 달 가까이 시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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