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통령''의 한심한 광고
  • 리영희 한양대 대학원 교수 ()
  • 승인 2000.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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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침략 야욕에 속지 마라’는 광고를 보면서 나는 충직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과 4천5백만 국민의 체면을 생각해서도 그렇게 한심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바로 지난 대통령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
며칠 전 아침, 아직 잠자리에 누운 채 신문을 펼치던 나는 깜짝 놀라 부엌에 있는 늙은 아내에게 소리쳤다. “여보, 큰일났어! 전쟁이 난대!” 부엌에서 뛰어나온 아내가 “난데없이 전쟁은 무슨 전쟁이요”라고 핀잔을 주기에, 나는 신문 한 면을 가득 메운, 어마어마하게 겁나는 광고를 펼쳐 보여 주었다.

그 광고는, 주먹만한 활자로 ‘김정일의 침략 야욕에 속지 마라’는 제목 아래, 금시 6·25전쟁이 다시 터질 듯이 겁을 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광고를 보면 나와 마찬가지로 빨리 피난 보따리를 싸자고 펄쩍 뛸 줄 알았던 70세 아내가 신문 광고를 보고는 피식 웃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신문지를 나에게 들이밀면서 핀잔하는 것이었다. “여보, 똑똑히 보고나 놀라시오. 그런 따위 광고를 낸 사람이 누군지나 알고 전쟁이건 피난 보따리건 소리치시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조금 경솔했다는 생각과, 약간은 체면이 손상되었다는 마음으로 신문의 광고를 다시,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서야 세상 일에 무식한 70 노파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비웃는 말투로 “광고를 낸 사람이 누군지나 알고 말하라”고 한 뜻을 알아차렸다. 김정일의 속임수와 북한의 남침 야욕과 ‘적화 통일’이 눈앞에 닥쳤다고 겁을 주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 평화 추구 정책과 미국을 비롯한 일체의 대북한 화해 노선을 극렬한 말투로 비난하고 반대하는 그 광고의 주인 이름이 최근 2, 3년 전까지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행세하던 사람의 이름과 비슷했다.

때가 어느 때인데 전쟁 부추기기 장난인가

이 나라 국민 가운데 백만인지 천만인지의 찬성 서명 운동을 벌이겠다고 광고의 한쪽에 실린 서명 양식 맨 윗줄에 자기 서명을 한 이름 석 자가, 우리가 대통령이라고 알고 있던 그 이름이 아닌가! 광고문에서 하는 소리가 하도 유치하고 잠꼬대 같아서 설마 이것이 한때나마 ‘대통령’이라고 세상을 호령하던 사람의 소리는 아니겠지 싶었다. 적어도 나는 충직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과 4천5백만 국민의 체면을 생각해서도 그렇게 한심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바로 지난 대통령이라고는 믿고 싶지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광고료가 제일 비싸다는 그 신문에 그만한 크기의 광고를 내려면 모르긴 해도 수천만원은 들어갔을 것이다. 그따위 걸레 같은 광고, 그것을 내지 않고서는 쌓아두고 감추어 둔 돈을 평생 다 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정신 나간 부정축재자의 심심풀이 소행이겠지. 세상이란 이런 종류의 인간들도 가끔은 섞여 있어야 광대를 보는 것 같은 인생의 낙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 정도로 가볍게 치부하고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신문을 접으려 하였다. 하필 할 일이 많은 날 아침에, 아직도 반 세기 전 냉전 사상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능 지체아들의 전쟁 부추기기 장난에 나의 귀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지.

반 세기 동안 신물이 나도록 ‘전쟁’ ‘반공 국시’ ‘남침 위협’ ‘국가 위기’ ‘…호시탐탐’ ‘임전 태세’ ‘절대 복종’ ‘인권·자유 무용’에다 ‘북한 특공대 10만, 하룻밤에 포항까지 점령’ ‘평화는 몽상’ 등등의 궤변과 속임수와 협박으로 선량한 국민 대중을 수십년 동안 농락해온 광적인 극우·반공 주의자들이 이제, 동이 트는 하늘을 보고 밤의 요괴들이 겁을 집어먹듯이, 냉전·전쟁 위기의 종식과 화해와 평화의 조짐 앞에서 전쟁의 노스탤지어에 매달리는 가증한 작태이겠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래도 싶어서 다시 한번 광고주를 확인하고서야 나는 세상 모르는 늙은 아내마저 비웃어 버린 까닭을 알았다. 그 광고의 주인은 바로 얼마 전까지 5년 간의 집권 임기중, 제 머리로는 단 1분 간의 인사도 훈시도 연설도 할 능력이 없어서, 비서가 적어준 메모 쪽지만 읽다가 퇴임한 바로 그 ‘대통령’이었다.

그 머리로 하는 소리라면 바로 그 반대를 믿으면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신문의 1면을 보니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굳게 악수하면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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