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가 아니라 ‘비루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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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9.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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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네르기·비루스가 언젠가부터 에너지·바이러스로 바뀌었다. 이 말들은 독일 학자들의 성과를 담고 있는 만큼 독일어로 발음해야 하는데도 영어화했다. 그만큼 우리는 미국의 문화 속국이 되어 있다.”
한국에서 그리스어를 표기할 때 흔히 호메로스를 ‘호머’라고 표시한 것을 본다. 그리고 ‘일리아스’를 ‘일리아드’로 표현한 것을 본다.

‘호머’라는 말은 영어 사용권 국가에서 호메로스를 부르는 이름이다. 영어 사용권 국가에서는 플라톤도 ‘플레이토’라고 발음한다. 그러나 여기는 미국이 아니다. 여기는 한국이다. 한국 사람이 그리스 말을 쓰는데 왜 미국식 발음을 쓸까. 호머는 ‘호메로스’여야 한다.

이 문제는 단지 고유 명사 표기에 관련되는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언어 이상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일 때 늘 미국이라는 창을 경유해서 받아들이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했을지는 몰라도 문화적으로는 종속되어 있음을 드러내 준다. 외국어 표기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은 바로 이런 현실의 한 표현인 것이다.

이런 현실은 영화 제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에서 개봉되는 외국 영화들은 모두 영어 표기법으로 통일되어 버린다.

‘엥도쉰느’가 ‘인도차이나’가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워낙 일반화한 지리적 명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탱 게르의 귀환’이 ‘마틴 기어의 귀환’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고유한 이름이 미국식으로 둔갑해서야 되겠는가. 만일 일본이 힘이 세고 돈이 많다고 해서 ‘김정남’을 ‘가네 마사오’라고 읽는다면 김정남 자신은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영어가 아닌 모든 언어가 영어화해 들어오는 이 현실은 오늘날 우리 문화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미국 유학생 출신 지식인들이 ‘무국적 언어 확산’ 주범

학문의 세계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한국 학자들의 대다수는 미국 유학생 출신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유학이라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에 있으면서 자신의 확고한 주체성과 문제 의식을 가지고서 필요할 때 갔다 오는 것은 좋지만, 인생에서 가장 황금 같은 시절을 다른 나라에서 1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고 오는 것은 위험하다. 결국 독일에 유학한 사람은 독일 사람이 되어 오고, 미국에 갔다온 사람은 미국 사람이 되어 온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는 서로 독일이냐 미국이냐 하면서 대리 전쟁을 한다.

한국의 경우 특히 유학생 중에서 미국 유학생 출신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때문에 한국 지식계는 미국 지식계의 분점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배워 온 학문과 가치관을 그대로 한국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이 우리 지식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교육 정책 표류도 결국 우리를 미국화하려 한 멍청한 인간들 때문이다. 한국을 미국의 문화 식민지로 만드는 이 미국 유학생들이야말로 모든 언어를 영어화하는 주범들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특히 이공계 언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필자가 학부에 다닐 때만 해도 배우고 썼던 말들은 ‘비루스’ ‘알레르기’ ‘에네르기’ ‘페하(pH)’였다. 그러나 어느 사이에 이 말들은 ‘바이러스’ ‘알러지’ ‘에너지’ ‘피에이치’로 바뀌었다.

이 말들은 원래 독일 학자들의 성과를 담고 있는 말들인 데다 독일어로 만들어진 말들이다. 따라서 당연히 독일어로 발음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영어화했다. 이공계 지식인들은 아예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식하지 못한다. 너무나 익숙해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좀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미국의 문화 속국이 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필수로 배우고 또 각종 시험에서 영어를 필수로 보는 법도 폐기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해서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해도 절대 다수가 영어를 선택하겠지만, 처음부터 국가가 특정 외국어를 강요하는 것과 선택 과정을 거쳐서 주류언어가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영어에 특권을 부여하는 풍토는 하루빨리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는 한국이다. 미국이 아니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프랑스이든, 아니면 중앙아시아든 아프리카든, 그들의 문화는 모두 외국 문화이다. 배울 점을 배우고 비판할 점은 비판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미국만이 특권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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