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에 사랑 새긴 삼국시대 흔적 찾아
  • 강철주 편집위원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4.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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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 지음 <고대로부터의 통신>
역사는 늘 흥미롭지만 ‘고대’라는 말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달리 없지 않을까? 워낙 먼뎃적 이야기인 데다가 남아 있는 사료조차 변변치 않아 ‘구라’가 통할 여지가 많아서인지, 고대사는 현대사(혹은 현대인)의 ‘밥’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한·중·일이 고대사의 영역 싸움에 정권의 명운을 건 듯 핏대를 올리는 것도, 고대사의 틈새에 그만큼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많아서는 아닐까?

<고대로부터의 통신>(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지음, 푸른역사 펴냄)은 그같은 역사의 상상력이, 돌과 쇠에 새겨진, 명명백백한 금석문에 기대어 발휘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후대의 문헌 자료보다는, 고대인이 고대의 삶을 ‘직접’ 기록한 비문이나 부장품의 명문들에 더 주목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낯설지만 신선하다. 광개토왕비 비문이나 무령왕릉 지석, 칠지도나 진흥왕 순수비를 ‘고대가 현대로 보낸 통신’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울주 천전리 각석(刻石)을 보면, 서기 525년 어느 날 ‘벗으로 사귀는 오라비와 누이’ 관계였던 갈문왕과 어사추여랑이 경주에서 가까운 천전리 계곡으로 데이트를 나갔다가 바위에 자신들의 사랑을 남긴 것을 알 수 있다. 한문과 이두식 표현이 혼재한 이 금석문에서 독자들은 (저자들의 도움을 받아) 신라 왕실의, 연상녀 연하남의 애틋한 로맨스를 발견한다.

논둑에 버려진 성가신 바윗덩어리에서 국보로 격상한 ‘울진 봉평 신라비’와 ‘영일 냉수리 신라비’는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발견 스토리가 자체가 진진한 데다가, 신라의 6부 체제가 왕권 집중 체제로 변하는 전환기의 역사를 보여준다. 백제 의자왕 때 정계에서 은퇴한 사택지적이라는 귀족이 세운 ‘사택지적비’에는 늙어가는 자기 신세에 대한 한탄과 함께 백제의 역사를 이해하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정보들이 담겨 있다.
중국 옌볜에서 발견된 정혜·정효 공주 묘비는 발해가 중국 당나라의 지방 봉건 정권이었는지, 아니면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였는지를 가늠케 하는 기준이 된다. 경주 황남동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의 기록에서는 통일신라기의 창고 체계와 재정 운영을 엿볼 수 있다. 도굴범들을 체포하면서 발견된 최치원의 해인사 ‘묘길상탑기’라는 벽돌판 기록에서는 이른바 신라 ‘하대’의 혼란상을 짐작할 수 있다. ‘세기의 발견’으로 일컬어지는 무령왕릉 또한 무덤의 주인을 가리키는 지석이 출토되지 않았으면 백제사의 영원한 비밀로 남을 사건이었다.

<고대로부터의 통신>은 이처럼, 고대사의 비밀을 여는 가장 결정적인 열쇠로서 금석문을 동원한다. 몇 자 안되는 비문(碑文)과 명문(銘文)에서 몇백 배의 의미를 찾아내는 ‘고민과 추론’의 과정은 ‘역사적 상상력’이 어떻게 현실적 설득력을 갖는지를 보여준다. 문헌 자료와 달리 뒷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단편적이지만 생생한 1차 사료들이 한 줄거리로 꿰어지는 과정을 좇는 것은 즐겁다. 특히, 녹록치 않은 주제를 젊은 학자들의 공동 연구로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한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역사학의 결과뿐 아니라, 인간미 넘치는 역사학 연구의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드러낸 것도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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