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오정식 인사’가 더 문제다
  • <시사저널> 취재1부장 직무대행 徐明淑 ()
  • 승인 1999.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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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각 전에 연정희씨가 사직동 팀에 진술한 내용만 보더라도, 김태정 검찰총장의 법무부장관 승진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DJ는 그를 장관으로 발탁했다. 진실이 어느 쪽이건 간에 DJ는 임명권자
라스포사와 밍크 코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에게는 낯선 상호, 아득한 꿈 같은 옷이었다. 그런데 이제 두 단어는 서울의 초등학생에서부터 지리산 자락에서 다랑논을 매는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전국민에게 익숙해졌다. 겨우 열흘 만에 일어난 변화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사이에,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거칠어졌다. ‘사모님 중의 사모님’으로 불리는 고관 부인들의 행태는 사실, 해도 너무했다. 그들은 사회 봉사를 한답시고 떼지어 몰려다니며 사치품 쇼핑을 일삼았고, 그들의 모임은‘힘 있고 가진 자’들만의 폐쇄적인 고급 사교 클럽으로 변질되었다. 그것만으로도 IMF 체제 이후 눈물의 행군을 해온 서민들로부터 공분을 자아내고, 개혁을 외치는 현정권의 도덕성이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그들만의 파티’를 벌이는 데 그치지 않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하는 최순영씨 가족을 슬쩍,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강박해서 엄청나게 비싼 옷을 사실상 갈취했다. 남편들의 권력을 자신의 것인 양 호가호위(狐假虎威) 하면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한 것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의 여인네들은 남편이나 자식이 벼슬길에 오르면, 스스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예전보다 더 엄중히 자신과 가솔을 다스렸다. 이런 전통은 그들 자녀들이 기록한 부인 행장(行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라스포사 사건’ 여주인공들의 행적은 이와는 극히 대조적이었다. IMF 시대가 고위 공직자 부인들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처신을 깨우치지 못했고, 더 나아가 남편들이 집행하는 현행 법까지 스스로 어겼다. 이들에게는 조선 시대 여인네들만한 사회적인 인식도 결여되어 있었다. 필자는 그런 맥락에서‘아줌마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여자가 문제였다’는 지적에 십분 공감한다.

그러나 라스포사 사건을 바라보는 문제 의식이 여성 문제에 그쳐서는 안된다. 그런 접근은 본말을 전도하는 것이며, 문제의 핵심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 사건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더 큰 경고와 교훈은 다름아닌 인사 문제다. 그리고 더 큰 비판을 받아야 할 대목은 김대중 대통령의 인사 방식이다.

청와대가 직접 지휘하는 이른바‘사직동 팀’은, 지난 5·24 개각이 있기 훨씬 전에 라스포사 사건을 광범위하게 내사했다. 당시 검찰총장 부인인 연정희씨가 사직동 팀에 진술한 내용에만 의존하더라도, 김총장의 장관 승진은‘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더욱이 이미 김총장은 검찰 사상 초유의 검란(檢亂) 파동과, 검·경 간의 수사 독립권 갈등을 겪으면서 조직 장악력에 엄청난 상처를 입은 터였다.
김총장 장관 발탁으로 개혁에 대한 신뢰 뿌리째 흔들

그런데도 김대통령은 임기 2개월여를 남긴 김총장을 무리하게 법무부장관으로 승진 발탁했다. 무지렁이 국민들쯤이야 권력 내부에서 은밀히 전개된 특명 내사 사실을 영원히 모르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설혹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별 문제가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도저도 아니면, 사직동 팀이 김총장을 유난히 아끼는 김대통령을 의식해서 ‘대통령이 심려할 만한 보고’는 아예 올리지 않았던 것일까.

진실이 어느 쪽이건 간에, 김대통령은 임명권자로서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냈다. 이 사건의 진실을 일찌감치 공개했더라면, 그런 용기까지는 못 내더라도 김총장을 장관으로 발탁하지만 않았더라면, 현정권의 도덕성과 개혁에 대한 신뢰가 뿌리째 흔들리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김대통령은 여권 고위층이 강변하듯이 여인네들의 치맛바람으로 통치권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피해자가 아니다. 거꾸로 김대통령은 국민에게 되로 받을 상처를 말로 안긴 가해자이다.

물론 인사권자가 여론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나름으로 근거를 지닌 여론조차 외면하는 것은 더더욱 곤란하다. 여론의 검증 절차를 거친다고 요란하게 선전하면서도 정작 여론을 반영하지 않는 김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에 대해서는 ‘사오정식 인사’이라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여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진짜 사오정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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