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할 줄 모르는 국민에게 고함
  • 리영희 한양대 대학원 교수 ()
  • 승인 2000.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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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한민국’의 소유권자는 미합주국이고 정부와 국민은 셋방살이를 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그 답변은 이 나라의 국민이 ‘대한민국이 주권 독립 국가’라는 화려한 착각에서 깨어나는 날이다.”
대한민국은 주권 독립 국가인가? 누군가가 당신에게 이렇게 물으면 당신은 펄쩍 뛰면서 큰소리로 대답할 것이다. “물론이지! 무슨 그런 질문을 하는가! 대한민국은 주권 독립 국가이고말고!”

대한민국이 정말 주권 독립 국가일까? 당연히 그렇다고 믿고 있을 대부분의 선량하고 애국적인 대한민국 국민에게 최근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미국 공군 사격·폭격 훈련장에서 일어난 폭탄 투하 사건과 그 앞뒤의 처리 과정은 서글프지만 그 반대임을 입증한다.

5월8일, 폭격 연습 중인 미국 공군 대전차 폭격기가 엔진 고장이 일어나자 대형(500파운드) 폭탄 6개를 매향리 앞바다에 투하해, 주민 11명이 부상하고, 가옥 2백14채가 파손되고, 5개 마을 3천여 주민이 공포에 떤 사건(현지 보도대로)이 그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처음이 아니라 50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한국 국민(그 지방 주민)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이 상태가 한·미 양국 정부에 의해서 반 세기 동안 방치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미국에 맞서 이긴 오키나와 주민들

몇몇 민간운동 단체들이 길가에서 연일 목청을 돋우어 한·미 양국 정부에 항의하고 있지만 국민적 반응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부정에 항의하고 약자의 권리 편에 서야 할 신문들은 어떤가? 이 사건의 중대성을 사설로 거듭 다루고, 사회적 공론화를 위해서 연일 지면을 아끼지 않는 <한겨레> 신문 하나를 제외하면 이 나라의 나머지 큰 신문들은 ‘사건 기사’ 한두 개로 외면해 버렸다. 그러니 가뜩이나 무감각한 국민의 문제 의식에는 가벼운 파문조차 일어나지 않고 있다.3년 전, 일본 오키나와에서 미군들이 16세 여학생을 윤간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 전국의 크고 작은 시민단체와 신문·방송·잡지 들이 몇 달을 두고 주일미군의 만행에 항의했다. 그 결과로 가해자 처벌은 물론 오키나와 미군 공군 기지 폐쇄를 비롯한 주민측 요구 여러 가지가 관철되었다. 일본 정부는 국민 여론에 굴했고, 일본 정부의 요구로 미국 정부(군)도 처음의 완강한 입장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보잘것없는 작은 섬 오키나와 주민의 권리 의식과 투쟁이 세계 최강 군사 패권 국가인 아메리카를 이긴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한국 정부는 자기 국민의 고통과 권리 요구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매향리 사건의 진상 규명과 사후 대책을 놓고 아메리카(군)의 변명과 주장을 옹호하기에 바쁘다. 어느 국민의 정부이며 어느 국가를 위한 국방부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큰 대(大)자로 장엄하게 수식된 ‘大한민국’의 국가적 실태이다. 한심하고, 부끄럽고, 분노할 이 꼴이 어찌 이번 사건에서 뿐이랴! 미국과의 군사 동맹적 생존 반 세기의 무주권적 실태인 것을.

누구나 알다시피 ‘주권 독립 국가’의 4대 요소는 ‘영토·국민·행정(사법)권 및 국제조약 권리·의무의 이행 능력’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떤가?

1954년 11월에 발효한 이른바 한·미 방위조약(제4조)으로 대한민국의 영토와 영해와 영공은 무조건적으로 미국의 군사적 용도를 위해서 미국에 ‘양도(grant)’되었다. 이 민족의 주권 독립 국가로서의 제1 요건을 상실한 지 오래이다. 조약상 언제까지라는 기한도 없는 ‘무기한’이다. 미국 군대가 현재 점유하고 있는 7천4백만 평의 땅과 그 위의 건물·시설 이외에도, 조약으로만 보자면 ‘군사용으로 필요하니’ 대한민국 정부 청사 건물을 내놓으라면 내놓아야 한다. 누군가의 가옥이건 농토이건, 심지어 대통령 집무실인 청와대도 ‘미합주국 군대의 배치’에 필요하다면 양도해야 한다. 그것을 사용하는 비용이나 피해 보상도 ‘大한민국’이 부담해야 한다. 주한미군의 어떠한 흉악 범죄도 사실상 ‘大한민국’ 법정은 처벌할 권한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한·미 행정협정(주한미군의 지위와 시설 및 토지에 관한 협정)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大한민국’의 소유권자는 미합주국(군대)이고, 대한민국의 정부와 국민은 셋방살이를 하는 셈이다.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그렇다면 언제까지? 그 답변은 오직 이 나라의 국민이 ‘대한민국이 주권 독립 국가’라는 꿈과 화려한 착각에서 깨어나는 날이다. 이것이 매향리 사건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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