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개혁, 흉내라도 내라
  • <시사저널> 취재1부 부장 직무대행 ()
  • 승인 1999.04.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DJ는 얼마전 ‘정치 개혁을 위한 새 피 수혈’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런 정황을 감안할 때 이번 재·보선은 정치 개혁이 가능하리라는 그런 확신을 심어 주는 ‘시범 선거’여야만 했다.”
난세에 활약했던 인물 조조. 한국인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된 인물이다. 오죽하면 간사하고 사특한 사람을 두고‘조조 같은 놈’이라고 했을까. 그러나 역사의 기록들은 그런 조조마저도 정치적 명분과 국민에게 한 약속만큼은 무척 중요하게 여겼음을 증언한다. 그가 파죽지세로 이웃 나라를 정벌할 때 일이다. 그의 군사들이 민간인의 재물을 탈취하고 부녀자를 괴롭혀 원성이 자자하다는 이야기가 대원수 조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조조는 ‘백성의 보리밭을 짓밟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군율로써 엄히 다스리겠다’고 포고했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조조에게서 터져나왔다. 조조가 잠깐 조는 사이에 조조를 태운 말이 백성의 보리밭을 짓밟았던 것이다. 그 스스로가 한 약속을 지키고 군율의 엄숙함을 만천하에 과시하려면 자기 목을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조조가 실제로 그런 제스처를 취하자, 주변 사람들이 지도자가 존재해야 군율도 의미를 갖는다는 논리를 들어 만류했다.

자기 목 대신 조조는 주인을 잘못 이끈 말의 목을 베어 군율을 세웠다. 그 사건 이후 조조의 진영에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았다. 결국 조조의 이야기는, 정치 지도자의 약속이 현실에서 얼마만큼 무게를 가져야 하는가를 강조하는 정치 삽화인 셈이다.

지금 새삼 조조를 말하는 까닭은 3·30 재·보선이 옛 사람 조조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재·보선 선거전이 중반에 다다를 무렵, 김대중 대통령은‘정치 개혁을 위한 새 피 수혈’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 직전에는 무척 오랜만에 무릎을 맞댄 여·야당 총재가 선거법을 비롯한 정치 개혁 협상을 서두르자고 합의했다. 그런 정황을 감안할 때 3·30 재·보선은 정치 개혁이 한번쯤 본때 있게 이루어지리라는, 앞으로는 깨끗한 선거가 가능하리라는, 그런 확신을 심어 주는‘시범 선거’여야만 했다.

그런데 정작 현실은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한 약속이나 정치 구호와는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재·보선 현장을 취재한 기자들은 한결같이‘예전과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더 살벌하다’고 현지 상황을 전했다.

본디 치열한 전투일수록 보급품과 탄약이 많이 지원되기 마련이다. 이번 재·보선도 예외가 아니어서, 선거 막판에는 금품과 관권 동원 시비까지 벌어졌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구로 을 지역의 경우는, 양쪽 후보가 일찌감치 상대측에 의해 고소 고발된 처지다. 독자가 이 글을 읽을 무렵에는 선거 결과가 나와 있겠지만, 정치권이 심각한 재·보선 후유증을 앓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여당 기득권 포기해야 선거 풍토 변화

깨끗한 선거와 정치 개혁을 외치는 시기에 전혀 개선될 기미가 없는 혼탁한 선거를 목격하게 되는 현실. 따지고 보면 이런 풍경이 그다지 낯선 것은 아니다.

현대 정치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만큼‘정치 개혁과 돈 안드는 깨끗한 선거’를 강조한 정치 지도자도 찾기 힘들다. 실제로 강도 높은 정치 개혁 법안을 관철하기도 했다. 언론은 당시 개정된 선거법을 가리켜 ‘입은 풀고 돈은 묶는 선거법’이라고 평가했고, YS는 선거법을 어기는 행위에 대해서는 당락에 관계없이, 소속 정당에 관계없이 엄중 처벌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집권 여당은 선거법 개정 이후 처음 치러진 94년 ‘8·2 보궐선거’에서 그런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새 선거법을 향한 정치권의 긴장감은 크게 줄어들었고, 국민의 기대 역시 그만큼 줄어들었던 것이다.

조조가 우려했던 것도 바로 조직 내부의 긴장감 이완과 국민들의 냉소였다. 그래서 그는 약속을 지켰다는 명분과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실리를 동시에 얻는, 절묘한 정치적 절충안을 찾아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약속을 지키는 흉내를 냈을 뿐이지만.

그런데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민심을 얻기 위해 그런 흉내조차 내지 않으니 답답하다. 우선 여당부터 기득권을 포기하는 선거를 각오하지 않는다면, 선거 풍토가 근본적으로 변하기를 기대하기 힘들다. 기대와 믿음이 옅어진 자리에는 냉소의 싹이 자랄 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