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패권주의’라는 악령
  • <시사저널> 취재1부장 직무대행 ()
  • 승인 1999.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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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산 발언’은, 영남 패권주의가 얼마나 강고한 것이며, 영남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 지역 문제를 얼마든지 과장하고 왜곡할 ‘준비된 선동가’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순진함도 유죄다. 이는 특별한 경우에만 성립되는 명제다.

단순한 잣대로 비이성적이고 복잡다단한 현실을 재단하고 순진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치부하고 끝날 일이다. 하지만 현실 분석을 업(業)으로 삼는 언론인에게, 단순함과 순진함은 부끄러운 일이다. 더 나아가 직업적 범죄일 수도 있다.

지난 2월 필자는 한나라당의 지방 집회 이후 이 지면에서 DJ 정권에서의 지역 감정 문제를 다루었다. 영남의 지역 감정을 부추기는 야당 정치인들도 문제지만, 더 근본적인 책임은 업종 맞교환(빅딜)과 인사 과정에서 오해받을 소지를 제공한 현정권에 있다는 것이 글의 요지였다. 그리고 현정권이야말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악령인 지역 감정 문제를 종식시키는 정권이 되어야 한다는 충고도 덧붙였다.

이 글이 나간 뒤 안팎에서 만만찮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특히 강준만 교수는 <인물과 사상> 4월호를 통해 ‘반 정도는 동의하지만 반 정도는 동의할 수 없다’면서 지역 감정을 부추기는 쪽보다 현정권에 더 근본적인 책임을 돌린 데 대해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강교수의 비판론에는 수긍할 대목도 꽤 많았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지역 차별주의의 폐해를 절감했던 당사자가 그 고리를 끊어야 하며, 권력을 쥔 쪽이 더 많이 조심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필자의 판단은 여전했다.권력 상실 ‘금단 현상’ 1년 못 견디는 ‘준비된 반대자’들

그러나 최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산 발언’은 그런 판단과 소신이 얼마나 순진하고 단순한 것이었는가를 한순간에 깨닫게 만들었다. 필자는 간과했던 것이다. 30년 넘게 자리잡아 온 ‘영남 패권주의’가 얼마나 강고한 것이며, 또한 영남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라면 지역 문제를 얼마든지 과장하고 왜곡할 ‘준비된 선동가’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그리고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영남 패권주의를 지향하는 정치 정서와 정치인들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현정권의 근본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가를.

따지고 보면 김영삼 전 대통령부터가 호남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권력을 넘겨줄 수 없다는 ‘영남 패권주의’의 수혜자였다. 선후배나 친구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면면히 권력을 유지해 오던 대구·경북 세력은, 재집권할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90년 ‘호남을 배제한’ 지역 연합 구도를 도모했다. 90년 3당 합당이 바로 그것이었고, YS는 이 지역 연합 구도에 힘입어 권력의 자리에 올랐다.

그 배타적인 지역 연합은 호남 지역민들에게 쓰라린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영남 세력이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회적 편견 속에서 ‘3등 국민’의 처지를 감수하던 호남 사람들은, 자신들이 권력 네트워크에서 영원히 배제되는 ‘왕따’임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호남 지역 사람들과 이 지역 정치인들은 오늘날의 영남처럼 지역 정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지도 못했다. 행여나 다른 지역의 반감을 살까 저어했기 때문이었다. 호남 대중은 기껏해야 기표소 안에서 똘똘 뭉쳐 표를 던지는 것으로 한풀이를 했고, DJ는 ‘지역 등권론’이라는 원론을 빌려 모든 지역이 권력을 공유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설했다. 그런데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피해 의식에서 비롯된 호남의 지역 정서를 가리켜 ‘망국병’이라고 개탄했다.

그러던 YS가 이번에는 지역 감정의 대변인 노릇을 하면서, 온갖 확인되지 않은 풍설을 동원해 도무지 전직 대통령의 발언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지독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겉으로는 불우한 처지를 대변하는 듯 포장하면서도, 안으로는 영남 패권주의 부활을 선동한 것이다.

부산 발언 이후 YS 캠프 안에서 ‘부산 후계자 육성론’이 거론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이회창 총재를 비롯한 한나라당 지도부 역시 YS만큼 노골적이지 않을 뿐, 영남 정서를 의도적으로 부풀리면서 지역 감정을 조장하고 있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듯 ‘준비된 반대자’, 권력 상실로 인한 금단(禁斷) 현상을 1년도 못 견디는 세력들을 두고서 현정권의 책임론을 묻는다는 것이 얼마나 순진한 일인가. 필자의 순진함을 거듭 한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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