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다
  • (<시사저널> 편집장) ()
  • 승인 1997.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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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라토너 황영조 선수를 통해 비장한 승복과 원칙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마라톤과 다름 없는 대선 레이스에서 국민들은 민주주의 룰과 국민에 대한 신의가 지켜지기를 염원한다.”
조순 전 서울시장과 이인제 전 경기도지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선 레이스에 뛰어든 것은 당사자들에게는 일생일대의 결단일지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이 출마 선언을 한 것은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 임기 10개월을 남기고 그들이 사임함으로써 수도권 두 지역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틀이 깨져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당장 보궐 선거를 실시하더라도 새롭게 선출된 단체장은 9개월밖에 재임할 수 없으므로 갓 쓰다 장 파하는 격이 되고 만다. 현행 선거법은 자치단체장의 남은 임기가 1년 이내인 때에 궐위되면 보궐 선거를 치르지 않아도 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서울시는 행정 1 부시장이, 경기도는 부지사가 단체장 직무대행으로서 남은 임기 동안 살림을 꾸려갈 모양이다. 행정 1 부시장이나 부지사는 둘 다 대통령이 임명한 국가 공무원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결과적으로 서울과 경기도에서는 지방자치제가 다시 관치 체제로 돌아간 것이다.

‘정치의 명예 혁명’은 페어 플레이 정신으로

국민의 부름 때문이건 역사에 기여하기 위해서건 대선 출마를 결심했다면 두 후보는 최소한 잔여 임기 1년은 남겨두고 그만두었어야 했다. 두 사람은 그런 정도를 배려하는 데조차 인색해 보궐 선거를 치를 수 없게 만들었다. 만일 다른 시·도 단체장들마저 대선을 넘보았다면 지자제의 모양이 얼마나 우습게 되었을까. 대통령 임기 5년, 국회의원 임기 4년, 단체장 임기 3년이 복잡한 수열로 뒤엉켜 있어, 이 감투에서 저 감투로 넘나들이해 생기는 공백을 매끄럽게 수습할 제도적 장치를 보완해야 할 것이다.
지자제 단체장 사퇴로 빚어진 어수선함도 그렇지만, 이보다 더 혼란스러움은 이인제 후보의 경선 불복이다. 아무리 정치판이 말 뒤집기 일색이고 신의와 약속이 헌신짝이나 다름없다고 하지만, 경선 결과에 무조건 승복하겠다는 서약을 수없이 되풀이하고, 경선 후에도 패배를 깨끗이 받아들이겠다고 공언한 그가 ‘정치의 명예 혁명’을 기치로 내걸고 다시 등장할 수 있는가 아연해진다.

우리는 마라토너 황영조 선수를 통해 패장의 비장한 승복과 엄연한 원칙의 아름다움을 본 적이 있다. 지난해 3월 동아 마라톤에서 레이스 도중 갑작스레 다쳐 황선수는 29위에 그쳤다. 하필이면 애틀랜타 올림픽 참가 선수 선발전을 겸한 대회에서 부진하여 그의 출전이 난망해졌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우승 이후에도 아시안게임 우승, 한국 최고 기록 수립 등 올림픽 2연패를 향해 믿음직스럽게 달려가던 그로서는 너무나 안타깝고 억울한 결과였다. 체육계와 국민들은 그에게 출전 기회를 주는 길을 찾느라 부심했다. 그러나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용단을 보여주었다. “스포츠는 어디까지나 순수해야 하고 룰이 지켜져야 한다. 경기 결과는 물론이고 규정에 깨끗이 승복한다.” 그의 은퇴는 아쉽지만 청량했고, 승복이 독선보다 아름답다는 사실을 실감케 했다.

대선 레이스도 마찬가지다. 마라톤과 다름 없는 대선 레이스에서 출전자 모두가 민주주의 룰과 국민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를 염원한다. 룰이 무시되고 신의가 팽개쳐지면 정치 개혁은 헛물이고 도덕성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달걀과 약속은 깨지기 쉽다. 그러나 깨진 달걀이 부화할 수 없듯이 무너진 룰 위에서는 정치도 민주화도 성숙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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