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불량 만화’라는 말이 더 불량하다
  • 이재현 (문화 평론가) ()
  • 승인 1997.06.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포츠 신문과 만화 작가들을 고발한 ‘음대협’의 행위는 일종의 마녀 사냥이다. 오히려 음란·폭력성을 ‘조장’하는 것은 편협한 윤리적 잣대일 것이다.”
나는 요즘 태극기가 자랑스럽지 않다. 내가 한국 사람인 것이 점점 더 싫어진다.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 노동법 날치기 통과, 한보 부도에서 김현철씨의 구속에 이르는 사태 등은 나를 자기 혐오에 빠뜨린다.

정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삶의 모든 면이 그러하다. 꺾기란 금융계의 대출 제도에만 있는 관행이 아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 한국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각종 꺾기를 당한다. 남아 선호 풍조, 과외 열풍, 입시 지옥, 혈연·지연·학연, 호화 혼수, 잦은 전철 고장, 높은 교통 사고 사망률, 중년 남성의 높은 과로사 비율, 끊임없이 터지는 각종 붕괴 사고 등 우리 사회 특유의 각종 꺾기에 시달려야 한다.

문화 분야에서의 대표적인 꺾기는 검열 제도이다. 문화와 풍속에 대한 무차별적인 검열은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까지도 문화적 영양 실조에 빠뜨린다.

문화 분야에서 검열이 아주 야만적으로 자행되는 장르가 바로 만화이다. ‘미성년자 보호법’에는 ‘불량 만화’라는 용어가 있다. ‘불량 만화 등의 판매 금지 등’에 관한 법 조항은 12·12 쿠데타 직후 신설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한 방도로 폭력배 일소를 구호로 내걸었듯이, 12·12 쿠데타 세력도 만화를 희생양 삼아 자신들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만화야말로 불량한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창의적 매체

만화 평론을 입으로 하는 나로서는 왜 유독 만화 앞에만 ‘불량’이라는 말이 붙는지 알 수 없다. 불량한 것으로 치자면, 한국의 모든 분야가 불량하다. 불량 정치인과 불량 기업인들은 사과 상자를 주고받았다. 관치 금융도 불량하다. 기습적 버스 요금 인상도 불량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무차별적 검열도 불량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미성년자에게 해롭다.

그런데, 최근 ‘음란폭력성 조장 매체 공동대책협의회’(음대협)라는 살벌한 이름을 가진 단체가 스포츠 신문과 여기에 만화를 연재하는 작가들을 무더기로 검찰에 고발했다. 죄명은 바로 불량 만화 등의 판매 금지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만화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도 우리를 창조적이고 상상적으로 만든다. 만화에 고유한 과장·왜곡·비약의 상상력은 우리를 고정 관념이나 상투적 사고 방식에서 해방시킨다. 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서사적인 만화의 재미와 즐거움은 우리로 하여금 불량한 현실을 견디게 해준다. 또 영상 이미지로 전환된 만화는 멀티 미디어의 부가 가치를 좌우한다.

이른바 음대협의 이번 고발은 일종의 마녀 사냥이다. 음대협의 사고 방식에 의하면 성 표현물은 무조건 해로우며, 늘 청소년에게 음란성과 폭력성을 조장하여 범죄 충동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음대협이 기대고 있는 가설은 이론적으로 증명된 것도 아니고 실증된 것도 아니다. 단지 성과 폭력을 소재로 삼았다고 해서 그 표현물이 청소년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매체에 표현된 성과 폭력은 현실 속의 성이나 폭력과 전혀 차원이 다르며, 양자의 영향 관계는 쉽게 재단할 수 없다.

이런 논리라면, 예컨대 형사 범죄나 정치인의 부정부패에 관한 기사나 사진 등이 언론 매체에 실릴 수 없다. 왜냐하면 청소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논리야말로 폭력적이다.

음대협의 논리를 더 확장한다면, 음란성과 폭력성을 ‘조장’하고 범죄를 ‘양산’하는 것은 도리어 이러한 편협한 윤리적 잣대와 경직된 문화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만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며 바르다는 착각과, 성 표현물은 무조건 음란하다는 상투 관념은 창조적 상상력과 개성적 표현의 적이다.

불량 만화라는 개념은 좋고 나쁜 만화를 가리지 않는다. 무조건 모든 만화를 일단 불량한 것으로 내몰기 마련이다. 한번 ‘불량’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어떤 작가도 어떤 작품도 거기서 쉽사리 헤어날 수 없다. 불량 만화라는 말은 만화 일반을 불량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며, 만화는 무조건 나쁘다는 편견을 조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무차별적인 검열은 마녀 사냥일 뿐이다.

결국 불량 만화라는 말은 아무런 영양가도 없다. 아니 심지어 그 말은 작가의 창작을 옥죔으로써 결국 만화 애독자를 문화적 영양 실조의 구렁텅이에 빠뜨린다. 문화적 영양 실조에 걸린 상태에서는 머리를 움직일 수가 없다. 비판적인 사고를 가질 수 없으며 창조적인 감수성과 상상력을 키울 수 없다. 불량한 것은 만화가 아니라 ‘불량 만화’라는 말 자체인 셈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