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의 투명성 확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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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6.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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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에 연루된 공직자 몇몇을 처벌하는 대증 요법으로는 고질화한 부패를 뿌리뽑을 수 없다. 부패를 낳는 구조부터 개혁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공직 사회에 부패와의 전쟁을 예고하는 사정 한파가 몰아칠 조짐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전국의 시장·군수·구청장 등 고위 공직자를 모은 청와대 오찬에서 “부정 부패 척결 없이는 경제 발전도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일도 기대할 수 없다”라고 질타했을 만큼 지금 우리 사회의 부패 증후군은 심각하다. 올해 들어서만 증권감독원장·시중 은행장·재경원 국고국장·공정거래위원회 국장 등이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된 것을 비롯해 공직 관련 부정 부패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더구나 국가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국방부장관이 무기 선정과 구매 과정에서 브로커의 농간에 놀아나며 수억원을 수뢰한 것으로 드러난 사건이나, 서울시청 공무원들이 버스업자와 결탁해 저지른 범죄를 보면, 우리 사회가 위 아래를 가릴 것 없이 썩어도 너무 썩었다는 절망적인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공권력의 도덕성을 회복하겠다며 개혁과 사정의 칼을 높이 들었던 문민 정부 출범 초기의 서슬 퍼런 의지가 지금도 유효한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힘 있고 권력 가진 자들의 축재형 비리는, 그들이 부정의 대가로 착복한 금품보다도 국민으로 하여금 부패에 무감각하게 하고 나아가 부패한 생존 방법에 익숙하게 하는 윤리적 타락을 조장한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월급만 가지고 사는 사람 있나, 세금 제대로 내고 장사하는 사람 있나,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있나 하는 식의 저열한 천민 윤리를 확산시켜 국민 모두를 부패의 먹이 사슬 구조에 얽어매는 것이다. 이 부패의 늪에서 뇌물 수수·독직·직권 남용·청탁 비리가 관행으로 자리잡고, 일선 행정은 중·하위직 공직자가 부패를 방조하고 비호하는 형태로 변질되고 만다. 부패 구조의 피해자는 당연히 양식과 윤리 의식을 지닌 행정 소비자들이며, 훼손되는 것은 그 시민들이 지향하는 사회의 건강성이다. 부정한 자가 더 출세하고, 부패한 자가 떵떵거리는 사회에는 그 사회의 도덕적 수준에서 배태된 일탈과 범죄가 만연할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때에 정부와 검찰이 공직 사회를 비롯한 사회 각 분야의 부정 부패를 척결하고자 결의를 다진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썩은 부분만 도려내는 외과 수술은 한계

부패와의 전쟁에 나선 정부에 촉구하고 싶은 점은, 당장 비리에 연루된 몇몇 공직자를 색출하고 처벌하는 식의 대증적 수술로는 우리 사회의 고질화한 부패를 척결할 수 없음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일찍이 정부가 율곡 비리와 군 인사 비리를 단죄하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숙군 작업과 군 고위 장성·군납업자 등을 구속했는데도, 그와 동일한 양상인 이양호 전 국방부장관의 비리가 터져나왔다. 당국이 무기 선정 및 구매 과정에서 어떤 허점이 있었는가를 파악하고 그러한 취약 요소를 지닌 제도를 개선했더라면 적어도 똑같은 부정은 저질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시의 버스 비리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몇몇 공무원과 버스업자에게 쇠고랑을 채운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중 교통 수단으로서 버스 운영 체계는 어떻게 정비해야 하고, 버스 노선과 요금 결정에는 어떻게 투명성을 확보해야 하는가에 대한 현실성 있는 개선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정부의 사정 방식은 어느날 갑자기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외과 수술이었다. 부패한 부분을 도려내는 것 못지 않게 부패가 생성되는 구조를 개혁하는 원인 치료에 나서야 한다. 구조 개혁은 행정 체제 쇄신을 말하며, 제도와 시스템을 정비하여 국민 편의와 절차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작업을 뜻한다. 각종 인·허가권과 규제 수단, 금융과 세제 상의 권한을 움켜쥔 공직자로 하여금 스스로 청렴하고 도덕적이기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부정을 저지르려 해도 부정이 불가능하도록 구조를 개편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며 시급하다.

행정 구조 혁신과 리스트럭처링을 거치지 않으면, 국가 경영의 바람직한 모델을 기대할 수 없다. 부패 척결의 핵심은 비리 공직자 처벌보다도 행정의 제반 단계에서 투명성과 효율성을 확보해 시민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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