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열풍과 ‘중국 겉핥기’
  • 고미숙 (고전 평론가) ()
  • 승인 2004.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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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행은 관광이라는 ‘홈 파인 공간’에서 벗어나 유목의 지평으로 나아가야 한다. 끊임 없는 접속과 변이를 통해 새로운 삶을 구성할 수 있는 여행, 그리하여 여행이 삶이고 삶이 여행이 되는 배치, 그것이
지난 4월 하순, 4박5일 일정으로 중국 러허(熱河)에 다녀왔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여정을 밟아 가는 ‘테마 기행’에 참여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랴오둥을 가로질러 베이징으로 간 뒤, 거기에서 다시 러허로 향해야 했지만, 일정상 바로 베이징에서 출발해 러허로 가는 짧은 코스를 택했다.

베이징 곳곳에서 마주치는 전지현과 김희선의 얼굴, 한국어로 된 식당 간판,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이정현의 노래 등에서 ‘한류 열풍’을 실감할 수 있었다. 중국은 이미 낯선 이국땅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가장 편하고 만만하게 관광에 대한 욕구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한국 자본의 대외 확장을 확인하면서 뿌듯해하는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20세기 이전 중국은 조선과 하나의 문명권을 이루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세계 제국의 중심인 당나라에 해마다 정기적으로 유학생들을 보냈고, 원나라가 지배한 고려 후기에는 수많은 지식인이 그야말로 발바닥이 닳도록 중국을 드나들었다. 상대적으로 폐쇄적이었던 조선 시대에 세계로 통하는 창구는 오직 중국이었다. 그만큼 중국과 조선은 ‘오버랩’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오랜 기억과 흔적 들은 대체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지금 한국인들에게 중국은 그저 화려한 관광 코스일 뿐이다. 이름 난 유적지를 찾아 사진을 찍고,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값이 싼 호화 호텔을 이용하고, 특이한 상품을 파는 쇼핑 코너를 찾아 헤매는 것이 전부다. 단적으로 말해 한국인들은 오직 자본을 통해서만 중국과 만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근대 이전과 마찬가지로 중국은 여전히 매혹적인 대륙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은 운 좋게도 그 시절보다 더 당당하게 대륙을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협소하고 획일적인 틀과는 좀더 다른 방식으로 중국과 만나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중국 여행은 관광이라는 ‘홈 파인 공간’에서 벗어나 유목이라는 매끄러운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끊임 없는 접속과 변이를 통해 새로운 삶을 구성할 수 있는 여행, 그리하여 여행이면서 삶이고 삶이 곧 여행이 되는 배치, 그것이 곧 유목이다.

중국의 진면목과 저력 확인하는 여행법

나는 <열하일기>를 통해 그런 지혜를 배웠다. 1780년 연암 박지원이 랴오둥을 가로질러 연경(베이징)으로, 연경에서 다시 러허로 가는 대장정을 시작했을 때, 중원 대륙 곳곳에 잠들어 있던 말과 사물들이 일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연암은 열정적으로 그것들을 ‘절단, 채취’했다. 연암에게 여행은 곧 삶이자 글쓰기 자체였다.

그런 점에서 <열하일기>는 가장 아름다운 유목적 보고서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중국이란 무엇보다 연암 박지원을 만나는 공간이다. 특히 러허는 연암 박지원이 아니었다면 결코 마주치지 못했을 장소이다. 러허에는 연암이 마주쳤던 낯설고 이질적인 문명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연암은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 오지에 발을 내디뎠을 뿐 아니라, ‘무박나흘’의 고된 여정에서도 <일야구도하기> <야출고북구기> 같은 천고의 기이한 문장들을 써냈다.

이번 여행에는 나이나 직업, 성격이 전혀 다른 30여명이 함께 했다. 그럼에도 하나같이 흔치 않은 감동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암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아주 다른 종류의 ‘중국’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특별한 자취를 좇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지금, 여기’를 살아 숨쉬게 하는 지혜와 비전을 길어 올리는 것일 터.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한류 열풍에 편승하지 않고 중국의 진면목 혹은 대륙의 저력과 마주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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