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영화 등급 기준 수립하라
  • 편집국 ()
  • 승인 1996.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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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헌재의 결정은 음반 및 비디오에 대한 사전 심의 토대마저 뒤흔들어 놓았다. 한국 예술계 전체가 대전환기에 놓인 것이다.”
 
영화에 대한 사전 심의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문화계 전반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공공 질서와 미풍 양속을 보전하기 위해 영화에 대한 사전 심의는 당연하다고 강변해 온 당국의 논리를 뒤엎고, 표현의 자유에 근거해 줄기차게 사전 검열 철폐를 주장해 온 영화인들의 논리에 적법성을 부여한 것이다.

영화는 사상·지식·경험 등을 표현하는 수단의 하나이므로, 영화 제작 및 상영은 학문·예술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22조 1항에 의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헌법재판소가 내린 결정의 대의이다.

이번 결정으로 문화체육부 산하 기구인 공연윤리위원회(공륜)는 법적 존재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헌법재판소는 사전 심의를 헌법 제21조 2항이 금하고 있는 검열이라고 규정했는데, 그같이 판단한 주요 근거가 바로 사전 심의를 해온 공륜이 문화체육부라는 행정 관청, 즉 국가 권력의 산하 기구라는 사실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영화가 지닌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해 볼 때 혁명적인 것이다. 일제가 1922년 ‘흥행 및 취체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지 무려 7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폐지되리만큼, 영화에 대한 검열은 양보할 수 없는 국가 권력의 문화 통제 장치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우려하는 반향도 만만치 않다. 그동안 검열은 반정권적인 내용을 담은 영화들에 대해 국가 권력이 제재하는 수단처럼 인식되어 왔지만, 영화가 지나치게 성과 폭력을 묘사하는 데 대한 여과 장치 구실을 했음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 결정이 내려지자 시민 사회 일각에서 ‘당혹감’이라는 어휘가 바로 튀어나왔던 배경도 그같은 맥락에서다.

혼란스러운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전 심의에 관한 법 조문이 효력을 상실하자 일부 영화사들은 이미 심의를 거쳐 문제 장면을 삭제 당한 영화들마저 무삭제로 상영하겠다고 하고 나서는 마당이다.

또 사전 심의가 등급 심의로 전환하게 되면서, 너무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등급조차 매길 수 없는 무등급 혹은 등급외 영화들에 대한 처리 문제가 새로운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문화체육부는 일단 이런 영화에 대해서는 상영을 허가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영화인들은 그같은 조처 또한 사전 심의라고 주장하며 반발하고 있다.

‘규제의 새 틀 짜기’ 영화인과 협의해야

완전 등급제를 실시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 자녀를 둔 민간인 8~11명으로 구성된 등급심의위원회가 영화의 등급을 매기고 있다. 등급에는 다섯 종류가 있는데, 이 중에서 NC-17(17세 미만 관람 불가) 등급이 가장 엄격하다. 포르노 영화는 등급을 매길 필요 없이 전용관에서 상영할 수 있다. 프랑스를 비롯한 여타 선진국들도 포르노 영화에 대해서는 전문 상영관을 허용하는 대신 일반 상영은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영화인들이 우려하는 것은, 상영 불가라는 규제 자체라기보다는 그같은 조처를 밝히며 문화체육부가 취했던 자세다. 즉 헌법재판소가 사전 심의를 철폐하라고 주장해 온 영화인들의 의견을 인정했는데도 문화체육부가 이들과 충분히 상의하지 않은 채 대책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인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는, 각계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민간 자율 심의 기구를 구성하는 것이다. 영화인들은 바로 그같은 전제 아래 문화체육부가 존립 기반을 상실한 공륜으로 하여금 당분간 등급 심의를 전담하게 하겠다는 경과적 방침을 제시해도 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체육부가 관이 주도하던 구습을 여전히 되풀이한다면 영화 관련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파행이 불가피하고, 또 다른 반목이 빚어질 것이 자명하다.

영화에 대한 이번 결정은 음반 및 비디오에 대한 사전 심의의 토대마저 뒤흔들어 놓았다. 한국 예술계 전체가 대전환기에 놓인 것이다. 정부가 의사 결정 과정에서 민주적인 합의 절차를 존중할 때만 예술 문화의 창달을 가져오는 발전적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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