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사정, 국민의 돈을 돌려 달라
  • <시사저널> 취재 2부장 직무대행 ()
  • 승인 1998.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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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교체기마다 요란하게 사정이 진행되었고, 어느 정도 진상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불법 조성된 정치 자금이 국고에 환수된 적은 없었다. 그 돈을 국고에 되돌려 놓는 것이야말로 국난을 맞은 국민에 대한 예의
흔히 3류로 치부되는 영화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줄거리가 빤하고, 결말 부분이 지독히 싱겁고, 따라서 영화 관람에 바친 시간과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관객을 실망시키는 것은 비단 3류 영화만이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거르지 않고 상영된 ‘정치 자금 시리즈물’역시 지켜보던 사람들을 맥빠지게 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거창한 명분을 내걸고 시작되는 도입부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초반 전개 과정이 끝나고 나면, 지리멸렬함이 슬슬 엿보이기 시작한다. 마침내는 몇 명의 조연 혹은 한물 간 주연급들이 잡혀가고, 끝내는 여·야 합의에 의한 관련 법안 개정이라는 어물쩡한 결론으로 ‘끝’이다. 요란했던 도입부에 비해 맥 빠지는 대단원이 아닐 수 없다.

3류 영화의 3요소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이 시리즈물은, 정치물답게 3류 영화와 다른 점도 갖고 있었다. 1편에서 다 죽었던 악역들이 되살아나는, 곧 사면·복권을 줄거리 기둥으로 하는 속편을 내놓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속편은 1편이 준 실망감에 이어 일말의 배신감을 자아냈을 뿐이다.

정권 출범기에 이런 식의 시리즈물을 아예 제작하지 않을 뜻을 비쳤던 국민의 정부도 6개월여 만에 예의‘정치 자금 시리즈물’을 선보였다. 도입부에서 정대철이라는 깜짝 놀랄 조연을 선보인 이 시리즈물은 이제 이회창 후보 진영의 대선 자금 수사라는 본격적인 전개 과정에 돌입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스토리가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수사의 의도와 사정의 형평성을 의심하면서 차제에 여당의 대선 자금까지 수사해야 한다고 역공을 펼치는 야당, 야당이 국사범으로 다스려야 마땅한 범죄를 저질러놓고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격분하는 여당. 오랜 공백 끝에 정기국회를 앞두고 다시 파행을 거듭하는 국회. 외부를 향해 가파르게 새된 소리를 질러대면서도 국회 정상화를 명분으로 은밀하게 진행되는 물밑 협상. 그 밑에 깔린 또 하나의 복선(伏線)인, 거대한 정계 개편을 향한 모종의 움직임. 2년 반 전에 방영되었던 재탕 시리즈물을 다시 보는 듯한 느낌이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연과 조연의 배역이 바뀌었을 뿐이다.
결말이 또 비슷할 것 같은 예감

닮은 것은 중반부 전개 과정만이 아니다. 관객에게 늘 실망과 허탈만을 안겨 주었던 드라마의 결말마저 비슷해질 가능성이 예고되고 있다. 여당의 대선 자금과 관련해 여당은, 국정 조사는 수용할 수 있지만 특별검사제 도입에는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사저널〉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0.4%는 ‘여당의 대선 자금도 밝혀야 한다’고 답했다(18쪽 기사 참조). 여론조사에 나타난 민심은 자명하다. 여·야가 과거의 선거 자금 흑막을 스스로 고백하고 참회하는 명예로운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부패 청산과 정치 개혁의 새 장을 열기는 힘들다고 여기는 것이다.

다소 성급한 판단일지 모르지만, 필자는 이 정치 드라마의 뻔한 결말을 예감하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이쯤 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아까운 내 돈을 돌려 달라는 것이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슬 퍼런 청와대를 배경으로 조성했던 이른바 ‘통치 자금’잔여분, 이회창 후보 진영이 국세청 커넥션을 통해 마련했다는 선거 자금,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 후보 시절 당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던 20억원이 바로 그 돈이다. 정권 교체기마다 요란하게 사정이 진행되었고 어느 정도 그 진상이 밝혀지기도 했지만, 불법으로 조성되었다는 그 막대한 자금이 국고에 제대로 환수된 적은 없었다. 그때마다 국민은 드라마의 흥행을 보장하는 구경꾼이 되었을 뿐이고, 역대 정권은 이 드라마를 통해 나름의 정치 목적을 관철했을 따름이다. 외화 쿼터를 따내기 위해 3류 방화를 양산한 영화 제작자들처럼 말이다.

그동안 명백히 밝혀진 불법 정치 자금만이라도 국고에 되돌려 놓는 것이야말로, 뿌리 깊은 정경 유착이 오늘날 경제 위기를 불러왔다고 믿는 국민에 대한 예의이자, 국난을 겪고 있는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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