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는 시민이 개혁 불꽃 지킨다
  • <시사저널> 편집장 ()
  • 승인 1998.10.0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 사회의 시민들도 이제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시대의 방관자가 아니라,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싸움이 필요한지를 깨닫고, 기꺼이 그 싸움에 나서는 적극적 참여자로 바뀌고 있다.”
요즘 굼뜬 개혁 행보를 비판하는 시민 단체의 목소리가 달아오르고 있다. 김대중 정부 출범 2백일이 지난 지금까지 시민들이 체감하는 개혁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한 예로, 방송청문회 유보로 선회한 듯한 정부·여당에 대해 언론개혁시민연대가 발끈하고 나섰다. 4조원이나 국가적 손실을 유발한 방송 정책의 책임을 규명하겠다던 정부·여당이 슬그머니 실시 유보 쪽으로 돌아선 태도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방송청문회를 통해서 언론 내외부의 반민주적 요소를 뿌리 뽑고 권언유착 고리를 끊기를 기대했던 시민들로서는 앞으로 통합방송법 제정, 정기간행물법 개정, 신문 공판제 추진 등 언론 바로 세우기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겠느냐는 의구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방송청문회 건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에 시대적 과제로 떠오른 개혁 작업이 제대로 추진되고 있는가를 지켜보는 시민들의 눈이 매우 차가워지고 있다.
현재 정치권의 태풍인 정치인 사정과 고위 공직자 사정을 바라보는 시각도 곱지 않다. 사정의 당위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정치인과 공직자 사정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늘 반복되어 왔다. ‘구악 일소’‘부정 부패 척결’‘성역 없는 사정’따위 말은 너무 많이 들어 식상할 정도이다. 성역 없이 깨끗이 쓸어냈다는 정치판과 공직 사회는 정권이 바뀌고 나면 어떠했는가. 구악보다 더 질 나쁜 신악이 폭로되고, 옛날보다 더 악취 나는 부정 부패의 덩어리가 드러나곤 했다.

따라서 표적 사정이니 야당 탄압이니 하는 분란을 야기하는 1회적 인적 청산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정치권과 공직 사회에 부정 부패가 발 붙이지 못하도록 법적 장치를 마련하자는 시민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취지에서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참여연대)는 96년부터 부패방지법 제정 운동을 벌여왔고, 당시 야당이던 국민회의는 참여연대의 입법 청원을 토대로 하여 법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2년이 넘도록 이 법안은 국회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않고 있다.

시민단체에 ‘항의의 잠재력’ 끌어모아 주어야

참여연대는 최근 여·야 국회의원을 상대로 부패방지법 제정에 대한 찬반을 물어 제적 의원의 3분의 2가 넘는 2백38명의 찬성 서명을 받아냈다. 그런데도 올해 말까지 부패방지법 제정을 낙관하기 어렵다는 것이 시민단체의 말이다. 정치인 개별 의원들의 이해타산에 결부된 문제인 데다, 당론 차원에서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 제정된다 하더라도 국회의 수정·보완 과정에서 법안의 핵심 사항들이 변질되어 이 빠진 법안이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시민이 끝까지 의정 감시 활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경제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재벌 개혁을 위한 국민 10주 갖기 캠페인’을 벌여 소액 주주의 권한을 위임받아 대기업 경영의 투명성 여부를 감시하자는 시민운동이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 기업인과 언론인이 스스로 자신들의 영역을 개혁하기를 기대하고 마냥 지켜보기에는 너무 굼뜨고 갈팡질팡한다는 시민들의 인식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국제통화기금 체제에 들어선 이후 신분이 불안해진 중·장년층 시민들이 새롭게 사회 부조리를 절감하고 이러한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경향이 일고 있다. 사회 개혁을 촉구하고 이를 감시하는 시민운동의 동력은 하버마스의 이론에 따르면 한 사회의 저변에 깔려 있는 ‘항의의 잠재력’에서 분출한다. 우리 사회의 시민들도 이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시대의 방관자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싸움이 필요한지를 깨닫고, 기꺼이 그 싸움에 나서는 적극적 참여자로 바뀌고 있다고 할 것이다.

부정 부패를 씻어낸 사회, 투명한 경제 질서와 공정한 경쟁 원리가 지켜지는 사회, 깨끗한 정치와 청렴한 공직 윤리가 살아 있는 사회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자는 깨인 시민의 연대의식이 세를 얻어가고 있다고 보고 싶다. 어렵게 투쟁하는 시민단체의 깨인 시민들에게 범시민적 ‘항의의 잠재력’을 끌어모아 주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