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수 감독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李世龍 (영화 평론가) ()
  • 승인 1995.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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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감독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영상 예술의 면모 보여줘
소로우는 <월든>에서 ‘노동자는 기계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될 시간이 없다. 인간이 향상하려면 자신의 무식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데, 자기가 아는 바를 그처럼 자주 사용하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무식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고 나면, 노동자가 기계의 부속품일 수밖에 없다는 소로우의 체념이 성급한 절망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깊은 밤, 골방에서 70년대 운동권 지식인 김영수(문성근)가 글을 쓰다가 만년필을 내려놓고 허공을 응시한다. 법대를 졸업한 영수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배된 처지였지만 자신을 사로잡은 한 젊은이의 실체를 잡으려고 애쓴다.

그 청년은 전태일. 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다”라고 외치며 스스로를 태워버린 피복 공장 재단사였다. 스물둘이라는 나이로 분신한 전태일의 죽음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운동권 지식인들에게 벼락 같은 충격을 주었는데, 영수는 아직 전태일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영수가 70년대 초 평화시장으로 돌아가면 화면이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뀌고, 닭장처럼 좁은 공간에 실밥과 먼지가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희미한 알전등 밑에서 여공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밤샘 작업을 한다. 박광수 감독은 극중 인물 영수가 되어 전태일의 발자취를 되짚어간다. 그리하여 주사를 맞아가며 며칠씩 밤샘하는 동료와 여공들의 소원을 듣기도 하고, 허기진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거나 차비가 떨어진 전태일과 함께 자정의 밤거리를 달리기도 한다.

억압자에 대한 묘사 절제해 공감대 넓혀

하지만 감독은 결코 흥분하지 않는다. 전태일을 영웅적 투사라기보다 인간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청년으로 이해하는 까닭이다. 그 결과 이 작품은 진한 감동과 함께 더할 수 없이 깊이 있고 차분한 화면을 만들어 낸다. 이렇듯 객관적인 시각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계라도 저 노동자들처럼 가동하면 망가지겠다’는 공감과 반성을 이끌어낸다.

전태일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70년대를 껴안은 젊은 노동자의 삶과 그가 살다간 시대와 현실의 의미를 모두 끌어안는 이 작품은, 최근 한국 영화들이 보여주는 가벼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를 갖는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무게는 이처럼 시대 현실에서 담보를 구하면서도 억압하는 자들이나 집단에 대한 묘사를 절제함으로써 공감대를 넓힌다.

현실을 성토하되 구호에 그치지 않은 이 작품은 보기 드물게 깨끗하고 깊이 있는 화면의 꽉 짜인 구도와 맑고 섬세한 소리로 전태일의 삶을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영화를 영상 산업으로만 아는 사람들에게 영화가 영상 예술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는 것이다.

현실과 과거를 넘나들며 집요하면서도 명료하게 요점을 반복하는 이 영화는, 전태일에 관한 영화이면서 박광수 감독의 영화이기도 하다. 필자는 박광수 감독을 가리켜 광복 이후 최초의 영화 작가라고 말한 바 있거니와 이번 작품에서도 소재와 표현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자신의 세계를 확보하는 그의 고집은 매우 인상적이다.

과거 장면은 흑백으로, 현재는 컬러 화면으로 처리하여 시간과 공간을 분리시킨 것은, 본질적으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억압이 70년대 초와는 달라진 70년대 중반의 사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또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키며 진행하는 이야기 구조가 <그 섬에 가고 싶다>와 같은 방식이다. 이 영화를 만들며 박광수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지지하면서도 회의의 눈길을 보냈던 사람들에게 응답하면서 올해의 영화적 사건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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