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카메라에 침을 뱉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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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8.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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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생활이 우리의 은밀한 죄가 세상에 까발려지는 것이 좋은 일일까. 그것이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방송국에, 수사 기관에 법원에 항의해야 한다.”
올해 상반기에 수사기관이 행한 전화 감청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주어 50% 가까이 늘어났다고 신문은 전한다. 당국은 그것들이 모두 적법했다고 말하지만, 속내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우리 수사기관들이 그 기간에 준법하는 번거로움보다 감청하는 손쉬움에 더 매혹되었다는 점이다. 법원의 영장을 받기 전에 긴급히 시행되는 이른바 ‘긴급 감청’ 6백39건 가운데 절반이 넘는 3백27건이 결국 영장을 받지 못해 중지되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법원도 마찬가지다. 지난해에 견주어 올해에 특히 음습한 범죄가 많이 늘어났는지 모르지만, 전화 감청 급증을 거든 법원의 ‘너그러움’이 내게는 아무래도 찜찜하다. 그렇게 감청의 합법 공간을 넓혀 가다 보면, 불법 도청과의 경계는 점점 더 흐릿해질 것이고, 그래서 우리 시민 사회에까지 만연한 도청 관행을 다스릴 근거가 점점 더 허약해질 것이다. 감청 허가는 극히 엄격해야 한다. 감청에 대한 너그러움에서 ‘대형(大兄)이 지배하는 오세아니아’(조지 오웰 <1984>)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84년이 별일 없이 지나갔을 때, 많은 사람들은 ‘큰형님’ 출현은 단순히 기우였을 뿐이라며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큰형님’은 크렘린이나 백악관이나 국방부나 중앙정보국(CIA)이나 옛 국가보안위원회(KGB) 건물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큰형님은 몰래 카메라의 도움을 받아 ‘탐사 저널리즘’이라는 멋진 이름의 삼류 선정극을 만들어내는 방송국 프로듀서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고, 화장실과 탈의실에서 여자의 은밀한 곳을 찍어 파는 화가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고, 은행과 관공서와 백화점과 슈퍼마켓과 박물관과 가정집 현관 앞에 폐쇄 회로 텔레비전을 설치해 놓은 경계심 많은 자본가·관료·일상인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관음증 문화’ 진원지는 몰래 카메라

몰래 카메라라는 것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 나는 돈벌이를 위해서 그것을 이용했던 화가가 역겹기는 하지만, 그에 대해서 커다란 분노는 느끼지 않는다. 그도 ‘몰래 카메라 문화’의 희생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작 내 분노를 자아내는 것은 텔레비전의 몰래 카메라 관행이다. 텔레비전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몰래 카메라 문화, 즉 관음증 문화의 진원지이다. 이 추악한 습속을 어디에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우리 텔레비전의 PD 선생들은 오로지 정의감 하나로 사창가도 찍고, 개인 사무실도 찍고, 룸살롱 내부도 찍고, 남의 침실도 찍고, 아무 데나 아무 때나 마구 찍어댄다. ‘시사’ 어쩌고 또는 ‘추적’ 어쩌고 하는 번듯해 보이는 프로그램의 PD가 되면, 자기를 중세의 종교 재판관이나 미국의 특별 검사쯤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 이들에게서는 타인의 인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그 타인이 그가 보기에 범죄자든, 인간 쓰레기이든, 그들에게도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이 있다.

매매춘 행위가 나쁘기 때문에 거기에 몰래 카메라를 들이대도 괜찮다는 생각은, 심지어 그것이 공익을 위한 취재라는 생각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더욱이 우리의 몰래 카메라 연출자들은 매매춘 장면이든 다른 범죄 장면이든 특정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때때로 함정 수사를 펼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들의 탐사 저널리즘이란 ‘함정 저널리즘’이다. 그러고 보면 몰래 카메라의 피사체가 범죄자이고 인간 쓰레기인 것이 아니라, 몰래 카메라표 탐사 저널리즘이야말로 범죄이고 쓰레기인 셈이다.

우리의 몸뚱이 전체가, 우리의 은밀한 죄가, 그 모든 것이 세상에 까발려지는 것, 그것이 좋은 일일까? 우리 모두가 24시간 고해 성사를 해야 하고, 그래서 세상 전체가 고해실이 되는 것, 우리들 모두가 유리관 속의 동물이 되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일까?

그것이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부터라도 방송국에, 수사기관에, 법원에 항의해야 한다. 그리고 국회에 몰래 카메라를 불법화하는 입법을 청원해야 한다. 거기에 더해,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를 늘상 경계해야 한다. 실상 과학의 진보 자체는 큰형님에 대해 중립적이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큰형님과 친화적일 수도 있고 적대적일 수도 있다. 과학 진보에 따른 정보화는 지식을 한 곳에 모으기도 하지만, 바로 그런 속도로 분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큰형님과 집단주의 사이에는 커다란 친화력이 있다. 세상이 고해실로 변하는 때는, 즉 우리들 모두가 유리관 속 동물이 되는 때는, 집단주의가 과학의 뒷받침을 받았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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