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성, 유목민으로 사는 법
  • 고종속 (소설가) ()
  • 승인 1998.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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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성을 의미 있게 만든 유목민화는 궁극적으로 귀성의 의미를 박탈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마지막 귀성 세대로 만들 것이다. 유목민화가 완성되면 귀성은 의미를 잃게 된다. 유목민은 고향이 없는 인간이므
문화 비평 난을 맡아 꾸리고 있는 담당 기자는 이번 호가 추석 합병호이므로 추석과 관련된 글을 써 주면 좋겠다고 내게 말했다. 얼떨결에 그러겠노라고 대답은 했지만, 막상 책상 앞에 앉고 보니 막막하기만 하다. 추석에 대한, 아니 우리 민속 일반에 대한 내 불학 무식만 씁쓸히 확인될 뿐이다.

어설프게나마 대한민국의 각급 학교를 들락날락했으므로, 내가 추석에 관한 텍스트를 전혀 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텍스트들 가운데 첫 번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접한 국어 교과서의 한 단원이다. 그 단원이 농촌 풍경을 담은 일러스트와 함께 ‘추석이 가까워졌습니다. 밤도 익었습니다. 감도 익어 갑니다’라는 문장들로 시작했다는 것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러나 내가 세시 풍속에 원체 무심했던 탓인지, 추석에 얽힌 별다른 기억은 없다. 그래서 추석이라는 말이 특별히 연상시키는 것도 없다. 그저 그날은 휴일이라는 것, 아침에는 차례를 지내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그 전날 밤에 외박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 정도가 추석에 대한 내 감회다. 아, 사람들이 지방으로 많이 내려가 서울의 길막힘이 덜해진다는 생각도 떠오른다.

추석이 우리 사회에서 지닌 가장 커다란 의미는 귀성일 것이다. 저널리즘이 ‘민족 대이동’이라고 즐겨 표현하리만큼 추석 귀성객들은 그야말로 ‘인파(人波)’를 이룬다. ‘귀성 열차’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귀성’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돌아가 살피는’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와 조상을 살피는 것. 추석이나 설을 전후해 인파를 이루는 귀성객 때문에 귀성 열차까지 운행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겠다.

우리가 대체로 농경민이었을 때, 추석이 지닌 귀성의 의미는 거의 없었거나, 지금보다는 훨씬 덜했을 것이다. 농경민의 삶이라는 것은 붙박이의 삶이고, 대체로 가족을 핵으로 하는 집단적 삶이다. 그 삶은 고향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살다 고향에서 마치는 삶이다. 그러니, 그 시절에라면 추석이 되었다고 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귀성은 우리들의 삶이 유목민의 삶, 떠돌이의 삶이 된 이후에 의미를 갖게 된 현상이다. 사회과학자들이 농촌 해체니 농민 분해니 하고 말하는, 우리가 지난 한 세대 이상 경험해 온 ‘근대화’라는 이름의 사회 변동 과정에서 귀성이라는 말은 깊은 울림을 지니게 되었다. ‘악덕 사주’와 힘겹게 실랑이한 끝에 체불 임금의 일부를 받아내 야간 귀성 열차에 피곤한 몸을 실은 구로공단 여성 노동자의 순정한 이미지는, 그 진부함과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인에게 귀성의 표준적 이미지로 자리잡으며 어떤 가슴 뭉클함을 유발하곤 했다.

사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 가운데 하나이다. 또 비록 사람이 만들어낸 문자이기는 하지만, ‘수구초심(首邱初心)’이라는 말의 유래를 생각하면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사람만의 속성은 아닐지도 모른다.

지구촌 시대 현대인의 고향은 전세계?

그러나 귀성을 의미 있게 만든 유목민화는 궁극적으로 다시 귀성의 의미를 박탈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마지막 귀성 세대로 만들 것이다. 귀성은 농경민이 유목민으로 변하고 있는 동안에만 의미가 있는 현상이다. 유목민화가 완성되었을 때, 귀성은 다시 의미를 잃는다. 유목민은 고향이 없는 인간이므로.

현대인을 유목민으로 만들고 있는 궁극적 동인(動因)이 경제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유목민 체제를 유지하고 가속화하는 것은 통신의 발달이다. 인터넷은 이미 지구의 구석구석을 하나로 묶어 공간을 수축시켰고, 화상 전화기가 대중화하면 지구내 공간 사이의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심리적 거리도 의미를 많이 잃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모를 살피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갈 필요는 급격히 줄어들거나 없어질 것이다. 실제로 벌써 추석과 귀성 사이의 끈은 점점 얇아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추석 연휴를 귀성의 경건함보다는 바캉스의 가벼움으로 채운다.

게다가 개인주의·세계시민주의의 확대는, 통신망에 편승해서, 고향의 의미를 지금과는 다르게 만들 것이다. 그때, 고향은 공간적 의미보다는 시간적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공간으로서의 고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서울이나 부산이나 뉴욕이라는 고향을 잃는 대신에, 지구라는 고향을 새로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구인이라는 가족을 새로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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