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이 왜 '반편'인가
  • 이성욱 문학 평론가 ()
  • 승인 2000.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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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표현의 자유와 청소년 보호라는 나름의 정당한 개별 경우를 말끔히 봉합해 마름질하는 원리는 없다. 그러므로 양자는 서로를 이어주는 판단 기준을 찾아야 하는 공생 관계이다.
표현의 자유와 청소년 보호 문제를 언급한 지난번 문화 비평의 속편이다. 거기서 나는 이 시대의 성역인 청소년보호론에 대해 불신감을 드러냈다.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삼는 논리 밑에는 대개 청소년을 ‘온전한 인격’으로 보지 않는 관점이 완강하게 또아리 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 했다.

청소년을 반편으로 보는 여러 까닭 중 하나는 ‘전통’이 충실히 세습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가부장 이외의 존재는 인격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가부장 이데올로기 전통의 효과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가부장제에서도 청소년은 대화의 상대이다. 아버지와 아이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그 대화는 권력 있는 자(가부장)가 권력 없는 자(아들, 즉 청소년)를 앞에 두고 하는 독백이기 십상이다. 때로 그 아들의 자리(권력 없는 자리)가 아내나 딸(여성)로 바뀌기도 한다. 가부장과 ‘기타 식솔’이 높낮이 없는 평평한 방바닥에 각자의 엉덩이를 같이 대고 이야기를 나눈다 해서 동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대화가 되기 힘들다는 것은 이제 구문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지난번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를 둘러싼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있었던 어떤 ‘여성’ 변호사의 강력한 청소년보호론이다. 명민함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그 여성 변호사는 한국 사회에서 남자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여자를 대화 상대로 삼지 않는다는, 바꿔 말해 여성을 하나의 온전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대세이자 ‘전통’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예민하게 체험해 왔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이 당해왔던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한 구도를 가감 없이 반복하는 듯했다. 스스로가 남성의 자리가 되어 남성이 여성에게 대하듯이 청소년을 대하는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청소년 보호와 표현의 자유는 일단 별개 문제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는 말을 하면 혹자는 대뜸 이렇게 을러댄다. 표현의 자유가 그렇게 고수해야 할 미덕이라면, 당신은 성적 표현이 심한 영화를 당신의 딸과 같이 볼 수 있느냐고. 그리고 자신의 추궁에 흡족해 한다. 예의 토론회에서 어떤 시청자가 이현세씨에게 한 공격적 질문도 꼭 이런 것이었다. 이런 식의 질문은 일견 현실적이고 날카로운 질문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리 높게 쳐주어도 무지한 질문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거꾸로 이렇게 물어보자. 부부 간의 성관계가 윤리적으로 아주 떳떳한 일이라 해서 당신은 당신의 딸에게 그 떳떳한 장면을 서슴없이 보여주겠느냐고.

청소년 보호든 표현의 자유이든 또는 아름다운 부부 관계이든 딸의 견학이든, 그것 자체에만 주목하면 다 나름으로 정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서로를 조화롭게 연결하는 끈을 찾지 못했을 경우 갈등하는 일이 왕왕 일어난다. 칸트의 말을 빌리면, 무엇을 결정하는 판단에는 규정적 판단과 성찰적 판단이 있다. 규정적 판단은 하나의 원리가 먼저 ‘저 위’에 존재하고, 그것으로 현실에서 발생하는 모든 개별 경우의 정당성 여부를 규정하고 판단하는 것을 이른다. 근대 이전의 신의 율법이나 동양에서의 유교적 가부장 혹은 당대의 규범 등이 그런 원리에 해당한다. 그럴 때 문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 원리가 빈번하게 개별 경우에 대한 억압의 집행관이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원리로 말끔히 해석되지 않는 수많은 개별 경우가 산재하고 또 나날이 새로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이다.

그때 필요한 것이 성찰적 판단이다. 말하자면 개별 경우들이 자신의 정체를 판단하는 원리가 없다 해서 마냥 그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자신 그리고 자신과 상대와의 관계를 성찰적으로 관찰하고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덧붙이자면 그 성찰의 대상에는 상대만이 아니라 자신도 들어간다. 우리 사회에 표현의 자유와 청소년 보호라는 나름의 정당한 개별 경우를 말끔히 봉합해 마름질하는 원리는 없다. 그러므로 양자는 서로를 이어주는 판단 기준을 찾아야 하는 공생 관계이다. ‘그럼 당신 딸에게 그걸 보여줄 거야?’ ‘청소년 보호를 위해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자신 있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규범 원리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개별 경우의 정당성을 억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성찰하지 못하는 한 언제나 ‘힘센 놈이 장땡’이라는 야만적 규칙이 반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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