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 주술에서 벗어나자
  • 고미숙(고전 평론가) ()
  • 승인 2004.07.2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아직 약하기만 하다. 혹, 우리가 당한 슬픔은 한이고, 우리가 남에게 가하는 고통은 정당방위이거나 불가피한 것이라는 도착증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아리랑, 진달래꽃, 가시리, 서편제, 이산가족…. 이 낱말들이 공통적으로 환기하는 정서는? 답은 한(恨)이다.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대체로 이 답변에 동의할 것이다. 그만큼 ‘한이야말로 우리의 고유한 정서’라는 명제는 범국민적 상식에 속한다. 물론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뒤따른다. 반만년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은 늘 외침에 시달렸고, 민초들은 가난과 핍박 속에서 갖은 수난을 다 겪어야 했으며, 그 슬픔이 쌓여 마침내 한으로 응결되었노라는 식의.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전적으로 20세기 이후의 산물이다. 서양이 동양을 자신의 눈으로 덧칠한 것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한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근대는 근대 이전의 역사를 ‘근대적’ 방식으로 덧칠해 버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이라는 정서다.

한번 따져 보자. 한반도만큼 전쟁과 민란이 적었던 나라도 드물다. 수시로 왕조가 바뀐 중국이나 10년이나 내전을 겪은 일본의 역사를 떠올리면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천재지변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도 황사·대홍수·지진에 시달리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한반도의 산하는 감로수가 흐르는 땅에 걸맞게 평화와 풍요를 자랑한다.

일제 식민지 경험에 뿌리 둔 고통과 수난의 정서

우리 고전에서 비극적 결말을 가진 작품을 찾기가 어려운 것도 이런 역사적·지리적 조건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판소리계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장르에서도 해피엔딩이 아닌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서편제>가 국민 영화로 떠올랐을 때, 아이러니컬하게도 판소리 전문가들이 가장 당혹스러워했다. 소리를 얻기 위해 스스로 눈을 찌르는 주인공의 모습은 적어도 판소리의 ‘고유한’ 질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런 류의 자학적 수난이야말로 근대적 자의식의 발로나 다름없다.

그럼 어째서 이런 식의 전통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전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억압이라는 식민지 경험에 뿌리 박고 있다. 그때의 수난과 고통이 시간을 아득히 거슬러올라가 과거까지도 윤색, 변조해낸 것이다. 이렇듯,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모든 정서와 인식의 근거에는 대부분 일제 식민지라는 경험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맹목적으로 근대를 향해 치달리게 한 추동력이자,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폐해를 간단히 환원할 수 있는 안전 장치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우리가 침략자가 되었다. 그것도 세계를 주름잡는 미국·영국의 뒤를 잇는 세 번째 침략국이. 일제의 식민지에 시달린 민족이 이제 제국주의의 일원이 되어 약소국을 짓밟으러 가게 된 것이다. 마침내 한풀이를 하게 된 셈인가.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이라크 전쟁이 얼마나 추악한 전쟁인지 잘 알고 있다. 또 이 전쟁이 우리가 당한 침략의 21세기적 변주라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다. 일제에 맞서 투쟁한 독립 투사들과 미군에 맞서 자살 테러를 감행하는 이라크 무장 세력 사이에 적어도 윤리 차원에서는 어떤 차이도 있을 수 없다는 점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토록 무심하게 이 전쟁에 동조할 수 있는 것일까. 붉은 악마가 등장한 이후 한국의 시민운동은 폭발적인 결집력을 안팎에 과시한 바 있다. 거기에 비하면 파병 반대 목소리는 미약하기 그지없다. 혹 여전히 우리는 한이 많은 민족이라서 이 정도는 용납된다고 하는 무의식이 작동하는 것은 아닐지.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혹 우리가 당한 슬픔은 한이고, 우리가 남에게 가하는 고통은 정당방위이거나 불가피한 것이라는 도착증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아, 그렇다면 이제 그만 내가 겪는 슬픔과 고통에 사로잡혀 타인의 고통에 눈멀게 하는 이 조작된 정서적 주술에서 벗어나도록 하자. 부디!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