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한 돈, 더 추악한 돈 싸움
  • 김상익 <시사저널> 편집장 (kim@e-sisa.co.kr)
  • 승인 2001.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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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쯤 일이다. 작고한 시인 김수영의 수필을 읽다가 무릎을 탁 쳤다. 그가 젊은 날 함께 어울리던 문학 패거리 중 한 친구를 비아냥거리는 대목이었다. '저 친구, 언제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예술에 대해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돈걱정을 하고있는 거라구.' 정곡을 찌른다는 말이 바로 이게아닐까 하고 그때 나는생각했었다. 지게꾼이든예술가든, 월급쟁이건 재벌 총수건 세상에 돈걱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대단한재력가도 아니요 정치권에 몸 담은 사람도 아니지만 자타 공히 발이 넓다고 인정하는사람이 있다. 몇 년 전 우연히 그가 결혼식이나 상가에 보내는 '봉투'속 내용물이 얼마인지 알았을 때 하도 액수가 적어 처음에는 '사람이 뭐그리 쩨쩨해' 하며 흉본 적이 있다.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다. 경조사가 많은 달이면 돈 걱정이 유난히 많았을 그의주머니 사정은헤아리지 않고 잠시나마 경조금 액수로 한사람의 인격을 평가하려 했으니 나야말로 돈생각이 많은 속물인지 모른다고 여겨졌다.

날이 갈수록 돈이 어려워진다는 느낌이 커진다. 때때로 돈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도 생긴다. 돈을벌기도 쉽지 않지만 쓰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그럴수록 돈에 대한 걱정을 없애야겠다고 다짐하지만 그게 말이나생각처럼 쉽지않다. 많이 벌든 적게 벌든, 내가 쓸 수 있는 돈의 용도와 용처에 당당할 수 있다면 그만한행복이 어디 있을까 싶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딱할 때가 있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사람들 만나밥 사고 술 사고, 선거 때면집을 팔아도 모자랄 만큼 돈을 뿌려야 한다니보통 사람이라면엄두도 못 낼 일이다. 돈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깨끗하지 못한 돈에 손을 벌리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정치인들이 신년벽두부터 돈걱정을 할 일이 또 생겼다.옛 안기부가 간첩 잡으라는 돈을 정치권에 빼돌리자 간큰 정치인들이 그 돈을 덥썩 받아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단다(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도대체 걱정은 어디에 붙들어 매놓았을까). 오로지 국가 안보 때문에 예산의 규모와 용처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 안기부 예산 중 천억대 돈이 수년 전, 그것도 문민 정부 시절에 집권여당으로 새어나갔다면 이것은 국민이 결코 용납하지못할 일이다.

일반 국민들도 이제는과거 권위주의정권 시절의 이른바 대통령통치 자금이라는것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안기부의 정치 공작이 어땠는지 대충 짐작하고도남는다. 명백한 증거가 드러난 적이 없었을 뿐이다. 그동안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린 검찰이이번에야말로 정치권의 눈치 보지않고 국민 앞에낱낱이 진상을 밝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검찰, 공정 수사로 진상 낱낱이 밝혀야

물론 야당이 주장하는 대로 이번사건이 지닌 정치성을 의심할 만한 구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야당도 이른바 김대중 비자금사건 따위를 또다시 들고 나오는것일 게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느냐, 이 참에 다 까발려 볼까? 하는 식이다.

정치 세계에서는 그런 공격과 수비가 하나의 게임으로 통할지 모른다. 치고 받고 밀고 당기다가 슬그머니 타협해서 덮어버리는 데 이골이 나 있을 것이므로. 하지만 그것은 시쳇말로 '택도 없는' 소리다. 정치 자금을 둘러싸고 누구한테 뭐가 얼마나 많이 묻었는지한번 대보자며 엉덩이를 까는 배짱 싸움을 즐기고싶은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 있는 그대로 밝혀지기를 기대할 뿐이다. 잘못이있는 정치인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정치인이아니라 잔돈푼을 걱정하는 국민이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쩔쩔매는 사람과 꺼림칙한 돈을 주고받은 정치인 중에서걱정이 많은 것은 누구일까. 아무래도 후자 쪽이 아닐까. 제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언제 잡혀 들어갈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테니까.그런 불행한 정치인들의 걱정거리를 덜어주기위해서라도 검찰이 분발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나 하나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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