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베끼는' 나와 세 감시자
  • 고종석(에세이스트) ()
  • 승인 2001.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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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양심의 눈을 질끈 감고 내 글을 베낄 때, 적어도 세 사람은 그것을 알아 차릴 것이다. 이 불쌍한 글쟁이를 세 사람 독자가 고맙게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을 웬만한 한국인이라면 다 알게 되었을 즈음, 어느 술자리에서 그 책의 저자 홍세화씨에게 투정을 부린 적이 있다. "책을 써서 제가 홍선배만큼 벌려면 홍선배가 책 한 권을 쓰는 동안 제가 100권을 써야 하는데, 이건 너무 불공평하군요. 제가 홍선배보다 젊으니 홍선배가 한 권 쓰실 동안 서너 권 쓰는 것까지야 혹시 몰라도, 100권은 아예 불가능하잖아요."


말하자면 홍세화씨의 책이 내 책보다 100배쯤 더 나간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을 나타낸 우스개였다. 100배라는 계산은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가 30만부 갔다고 셈하고 내 책이 3천부 나간다고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초인적 정력을 발휘해서 홍세화씨보다 100배 많은 책을 낸다고 하더라도, 내가 만날 수 있는 독자가 그의 독자만큼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한 번 읽은 저자의 책을 다시 사게 되는 것이 독자의 관습일 터이므로, 내가 책을 100권 낸다고 해도 내가 만날 수 있는 독자는 3천에서 크게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책을 쓰는 중요한 동기가 많은 독자와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라면, 나는 불행한 저자다.


더구나 나는 글쓰기의 염결을 받드느라 일부러 독자를 내치는 저자도 아니다. 예컨대 나는 소설가 이인성씨 같은 불친절한 저자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돈 욕심 때문에, 은근히는 이름 욕심 때문에, 나는 되도록 많은 독자에게 영합하려고 갖은 꼼수를 쓴다. 그런데도 책은 팔리지 않아 출판사 사람들과 사이가 서먹해진다. 결국 나는, 소설가 은희경씨의 말투를 훔치면, 타인에게 말을 거는 데 무능한 셈이다. 그래서 이제는, 책을 써 호사를 누려 보겠다는 망상은 완전히 버렸다.


독자는 저자에 대해 애호가이면서 감시자이기도 하다. 독자가 많은 저자일수록, 아무래도 자신의 글쓰기에 더 많은 규율을 부여할 것이다. 그런데 고작 3천 남짓의 독자에 얽매인 나도 이제는 글쓰기의 방종을 예전만큼 누릴 수가 없다. 여기서 글쓰기의 방종이란 주로 '자기 표절'을 뜻한다. 어느 자리에선가 고백한 바 있지만, 나는 프랑스에 살던 시절 그 나라의 신문이나 방송에서 얻은 정보를 거의 가공 없이 기사화해 출처를 표기하지 않고 한국으로 송고하기를 밥먹듯 했다. 국내에 프랑스어 해독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악용해서 그 나라 책을 베껴 먹은 것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는 남을 베끼는 데서 더 나아가 나 자신을 베끼게 되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예전에 쓴 글을 부분적으로 훔쳐내 새 글의 줄기로 삼는다는 말이다. 한 번 썼던 것과 비슷한 주제로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다시 생각을 짜내기도 귀찮아 예전에 한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나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오래 전에 쓴 글을 누가 기억하랴 하는 심보에서였는데, 이제는 그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내 윤리적 각성 때문이 아니라 세 사람의 독자 때문이다.


아버지와 스웨덴어 학도 그리고 강준만


한 사람은 내 아버지이다. 이 분은 몇 해 전에 고등학교 평교사로 정년 퇴임을 하셨는데, 당신의 자식이 쓴 글을 모으는 것으로 노년을 소일하고 계시다. 잡지의 꽤 긴 글에서부터 신문의 조각 기사까지 자식이 쓴 글이라면 꼭 찾아 읽고 간수하시는 이 분의 열정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나를 베끼기가 어렵게 되었다. 또 한 사람은 스물일곱 먹은 스웨덴어 학도다. 나는 지난해 여름 e메일을 통해서 그와 친구가 되었는데, 올 들어 그를 두 번 만났다. 그런데 처음 만난 날, 그는 나 자신도 까맣게 잊고 있던, 내가 쓴 책들의 자잘한 내용을 들추어 내며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해댔고, 나는 그의 얘기가 내 '자기 복제'에까지 미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전북대 강준만 교수다. 강교수는 책이나 언론 매체를 읽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니 내 글이라고 그의 눈을 피할 재간이 없다.


내가 양심의 눈을 질끈 감고 내 글을 베낄 때, 적어도 이 세 사람은 그걸 알아차릴 것이다. 그것으로 날 타박하든 안 하든 말이다. 글쓰는 것말고는 아무런 돈벌이 능력이 없는, 그러면서도 그 글쓰기로 돈은커녕 사랑도 명예도 얻지 못한 이 불쌍한 글쟁이를 세 사람의 독자가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할까? 그래야 할 것이다. 내 양심은 이들 없이도 내 글쓰기의 방종을 막아줄 만큼 굳건하지를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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