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정국을 방불케 한다니…
  • 이재현(문화 평론가) ()
  • 승인 2001.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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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를 남남 갈등이라고 표현해서는 안된다. 50대 남성이 30대 여성의 등을 후려치는 장면을 굳이 갈등이라고 표현하자면 남녀 갈등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다."




IMF체제가 끝났다. IMF 체제를 불러온 1997년의 환란은 DJ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고, 경제 구조 개혁에는 실패했지만 일관되게 유지해 온 남북 화해 정책을 바탕으로 DJ 자신은 김정일과 만찬장에서 건배를 하기에 이르렀다.


IMF 졸업식 날, 강정구 교수를 포함한 방북단 7명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다. 일부 신문들은 이번 평양 8·15 민족대축전으로 인한 파문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듯하다. 이들 신문사는 이른바 '남남 갈등'이 본디 DJ 정권의 일방적인 대북 정책의 소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이 남남 갈등은 해방 정국을 방불케 하는 '좌우 대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 달 사이에 이루어진 남한에서의 화용론(話用論, 언어사용법에 관한 기호학의 이론)적 인플레를 염두에 두고 말한다면, 좌우 대립이라는 말은 이번 사태를 규정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 지난 8·15 전까지 좌익 내지 사회주의로 낙인 찍혀 왔던 것은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과 전교조의 사립학교법 개정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소액주주운동과 사립학교법 개정 운동에 비교한다면 "김일성 장군님…" 등의 언행은 좌익이나 사회주의보다 더 '극악무도'한 무엇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나는 주사파를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지만, 참여연대를 사회주의 세력이라고 매도한 자유기업원이 애써 옹호하려는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따르자면, 이번에 파문을 일으킨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는 강정구 교수의 글은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어떠한 사상도 자유스럽게 표현될 수 있다. 모든 생각과 그 표현은 '사상의 시장'에서 자유 경쟁 메커니즘에 맡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다. 내가 주사파를 시대 착오라고 규정하는 자유를 갖고 있는 만큼, 주사파 역시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찬양할 자유를 갖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번 방북단 일부의 언행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실정법에 저촉되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법원이 판단할 것이다. 이에 앞서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핵심적인 과제는, 이 사태를 어떤 식의 의제로 만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는 나로서는 이번 사태를 해방 정국과 비교하는 담론을 제일 먼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담론의 생산자는 주로 그 사주가 탈세로 구속된 일부 신문사이다. 이 신문사들은 노동자들이 지난 봄 파업할 때, '가뭄에 웬 파업?'이냐며 일방적으로 노동운동을 매도했다. 그러나 국세청과 검찰의 발표에 따르면, 이들 신문사야말로 IMF 기간 내내, 그러니까 가뭄에도 탈세, 홍수에도 탈세, 태풍에도 탈세, 폭설에도 탈세를 계속해 온 집단이다.


일부 신문사가 '조폭'으로 보이는 이유


이번 민족대축전으로 인한 파문에서 내가 읽은 것은 이들 신문사야말로 영화 〈친구〉에서 묘사된 '조폭' 집단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탈세말고도 이들이 조폭으로 보이는 이유는, 서로 경쟁적으로 DJ정권의 거의 유일한 업적이라고 해야 할 남북 화해 정책에 칼침을 놓고 있다는 점이다.


〈친구〉를 둘러싸고 이루어진 논쟁에서 부각된 논점은, 살인을 저지른 친구를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거나, 과거의 친구에게 수십 번 칼침을 놓는 우정과 의리라는 것은 결국 남성 패권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점과 근대적이고 자립적인 성숙된 자아가 바탕이 된 인간 관계가 아직 정립되지 않은 우리 사회의 수준을 반영하는 점이라는 것이었다.


방북단이 귀국하는 날 공항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를 남남 갈등이라고 표현해서는 결코 안된다. 경찰과 카메라 앞에서 50대 남성이 30대 여성의 등을 후려치는 장면을 굳이 갈등이라고 표현하자면 남녀 갈등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남한에서는 아직 독점 자본과 국가보안법과 가부장제와 족벌 언론이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누군가에게 칼침을 놓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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