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심은 사람
  • 박순철(언론인) (scp2020@yahoo.com)
  • 승인 2002.04.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침 일찍 개를 데리고 한강 둔치에 나간다. 마스크를 쓰고 조깅하던 어느 아주머니의 모습이 안쓰럽던 전 날에 비하면 누른 모랫바람은 훨씬 얌전해졌다. 먼지 속에서 드러난 남산의 조그만 모습이 애잔하다.





며칠 새 둔치의 풍경이 달라졌다. 몇십 그루의 느티나무·홰나무·벚나무 들이 5∼6 m 키로 여기저기 섰다. 트럭으로 가득 나무들을 날라 오고 중장비로 땅을 파더니 어느 틈에 자코메티의 조각 같은 나무들이 부축을 받으며 섰다. 잎이 하나도 안 달린 가지를 앙상하게 뻗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박해받는 무리를 연상시킨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다시 읽는다. 이 짧고 단순한 이야기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남겼다는 사실은 마치 모든 사람들 안에 선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는 종교적 명제를 증명하는 것 같다. 인도인들의 합장이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을 알아본다’라는 의미라는, 그런 식의 감동을.



책 속의 ‘나’는 오래 전 황폐한 고원지대로 홀로 도보 여행을 떠났다. 사흘 뒤 폐허가 된 마을에서 마실 물을 찾으려 했으나 샘은 바싹 말라 있었다. 혼자 사는 초로의 양치기를 만나 물과 잠자리를 얻었다. 양치기는 저녁 식사 뒤 테이블 위에 도토리를 쏟아 놓고 100개의 실팍한 도토리들을 정성스레 골랐다. 다음날 그는 이 도토리들을 땅에 심었다. 누구의 소유인지도 모르는 땅에 그는 매일 이렇게 생명을 심어 갔다.



여러 해 뒤 ‘나’는 다시 그를 찾았다. 어느새 떡갈나무·너도밤나무 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물이 흐르면서 풀밭·정원·꽃 그리고 사람들이 되돌아왔다. 그 동안 유럽에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광란의 살육에 몰두했지만 그는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혼자 계속 나무를 심어 갔다.



이야기의 끝부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단순히 육체적·정신적 힘만을 갖춘 한 사람이 홀로 황무지에서 이런 가나안 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면,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조건이란 참으로 경탄할 만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곤 한다.’(김경은 옮김)



생명을 심을 때 인간은 거인이 된다. 나무 심는 일이 관료적인 행사로 왜소해져 버린 것이 안타깝다. 연극 무대 만들 듯 뚝딱뚝딱 다 자란 나무들이 갑자기 등장하는 풍경에 어느덧 익숙해 버린 내 불감증의 두께가 새삼 느껴진다. 나무는 생명이 아닌 산업 사회의 무대 장치로 변했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예쁘장한 리포터들이 산 물고기를 먹는 장면을 보면서 세태의 변화를 실감한다. 1970년대 중반 밤낚시를 갔다가 장난꾸러기 친구가 막 잡은 물고기를 날로 먹는다고 했을 때 느꼈던 충격은 이제 내 퇴색한 앨범의 한 장면일 뿐이다. 생명에 대한 폭력의 일상화, 우리는 그렇게 지난 한 세대를 보냈다.



‘나무 묘지’가 일깨워준 신선한 감동



그래서였나? 어느 경제학자로부터 나무 묘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꼈던 신선한 느낌은. 그는 청와대에 파견 나갔을 때 화장한 사람의 재를 나무에 뿌려 나무 묘지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민원 서류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다가 이응준의 단편소설 <이제 나무 묘지로 간다>를 읽게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여자 친구는 스위스 어딘가에 나무 묘지가 있다면서, 사람이 죽으면 유해 가루를 뿌리에 주사한다고 말한다.
“난 죽으면 나무 묘지로 갈 거야. 내 몸의 찌꺼기와 영혼을 키 크고 튼튼한 나무 속에 넣어 줄 사람을 찾고 있어. 얼마나 멋있어. 나무가 된다는 거. 말을 안 하고 살아도 되고, 내가 양팔을 가지로 벌리면 햇살이 녹색의 잎사귀들을 황금으로 도금하고, 새들은 그 밑에 쉬며 내일 찾아올 폭풍우의 소리를 미리 듣겠지.”



네 계절이 있는 문화권에서 봄은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공업화 과정의 긴 겨울 동안 우리 안의 많은 것이 죽었다. 생명에 대한 외경 그리고 감수성이 자연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나무와 나, 자연과 나, 사회와 내가 한 줄기 수액의 흐름 속에 되살아날 수 있는 ‘봄의 제전’, 그 부활의 환영이 떠오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