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
  • 박순철(언론인) (scp2020@yahoo.com)
  • 승인 2002.05.2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연기자는 자기가 자기인 것에 싫증이 나서 연극을 한다.” 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친절 캠페인이 요란하다. 평소에 남을 배려하는 데 익숙했다면 이런 운동이 필요할 리 없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어느 일본인이 쓴 ‘서울 올림픽 때만 쓰레기가 없던 나라’라는 글이 생각난다. ‘그런데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서울 거리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그 국민은, 그 시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사실 모범 시민 실종은 미스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사르트르의 연기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잠시 동안만 무대 위에 서 있으면 되는 단역 배우였을 뿐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우리는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계속 지켜 보는 밖의 눈들이 있었다.



이런 의문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왜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면서 친절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가? 그리고 왜 이 집단적 가면극의 비윤리성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구심을 느끼지 않는 것인가? 월드컵 손님이 한국에 와서 느낄 인상에 대한 우리의 과도한 관심의 다른 편에는 우리 사회의 참 모습에 대한 병적인 무관심이 있다.



관광객과 외국인 노동자를 보는 ‘두 개의 눈’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물어야 할 핵심적 질문은 무엇보다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특정한 국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국민이 품고 있는 가치관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면, 우리를 지배하는 가치관이 무엇인가부터 물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우선 두 가지 통계 숫자를 비교해 보자. 한 달 동안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찾아 올 외국 관광객들의 수는 30만명을 좀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수와 비슷한 규모이다.



이 두 그룹은 물론 극히 대조적이다. 축구 팬들은 주로 부유한 국가의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로, 돈을 쓰러 온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모두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로, 돈을 벌러 온다. 그런데 잠시 있다 떠나는 축구 팬들과 달리 노동자들은 몇 년씩 여기에 머무르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들의 시선을 두려워해 본 적이 있는가?


이 노동자들이 대부분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한국에 대한 그들의 인상은 아시아 사람들의 한국관(韓國觀)에 두고두고 큰 영향을 주리라는 또 하나의 공리적 계산은 일단 접어 두기로 하자. 여하튼 현재 힘이 없다고, 그들을 때리고 욕하고 임금마저 제대로 주지 않는 사태를 방치하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은 과연 무엇인가?



돈 많고 힘있는 서양 사람들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을 강조하면서 돈 없고 힘 없는 아시아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인간적인 처사를 거듭하는 이런 이중적 태도는, 목숨을 걸고 찾아간 탈북자들을 외면한 일본 외교관들의 모진 타산과 과연 얼마나 다른 것인가?



나는 축제의 본질이 일상에 대한 부정으로서 불감증에 잠긴 한 사회의 의식을 깨우는 기능이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 왔다. 각성이 변화의 출발점이라면, 축제는 독특한 변화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월드컵 대회를 ‘무사히’ 치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타인의 시선 속에서 보아야 할 것은 길거리의 무례함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추한 물질주의와 거기에서 싹트고 있는 한국판 인종차별주의인 것이다.



그렇다면 월드컵 대회는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이 신선하고, 뜻도 깊고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파우스트>의 서막에 나오는 극단 단장의 대사다. 그렇다. 어떻게 하면 월드컵 축제를 재미있으면서 뜻 깊게 치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지구촌의 보편적 가치관에 맞는 사회,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