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큐, 히딩크
  • 김상익 편집위원 (kim@sisapress.com)
  • 승인 2002.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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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6개월 전 한국 축구가 어느 수준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강한 팀을 만나면 잔뜩 주눅이 들어 우왕좌왕하다가 한 골이라도 먹을라치면 수비가 와르르 무너지고, 미드필드에서 허둥지둥하다가 공을 빼앗기고, 어쩌다 공격 기회를 잡아도 촌스럽고 어이없는 공중볼을 날리기 일쑤였지 싶다. 후반 종반에는 체력이 바닥이 나 엉금엉금 기다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던 것 같고.






그 무렵, 최근 몇 년 사이 날씬하고 세련되게 다듬어진 일본 축구를 보면서 불안감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월드컵 본선에 오른 중국 축구의 발전은 앞으로 우리가 아시아 지역 예선을 통과하기도 쉽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갖게 했다.



지난 5월26일 일요일 저녁 한국 축구 대표팀은 베스트 일레븐이 총출동한 세계 랭킹 1위 프랑스에 2-3으로 졌다. 그에 앞서 잉글랜드와 가진 A매치에서 한국은 1-1로 비겼다. FIFA 랭킹이 높지 않지만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는 ‘킬러 부재’라는 불안감을 털어 버리듯 무려 네 골을 퍼부었다. 불과 4개월 전 북중미 골드컵에 출전해서 실망스러운 결과를 안겨준 한국 대표팀이 이렇게 달라지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있었을까? 히딩크 빼고?



물론 최근 몇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해서 월드컵 본선 16강 진출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경기는 해봐야 알고, 한국이 맞닥뜨릴 상대는 어느 하나 호락호락한 팀이 아니다. 그러나 히딩크 사단은 어느 팀을 만나도 부끄러운 경기를 펼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국민에게 심어 주었다. 설사 16강 진출에 실패하더라도 박진감 있고 내용 있는 경기를 보여줄 것이 분명하다. 그것만으로도 한국 축구는 한 단계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긴 안목으로 대표팀 이끈 ‘냉철한 승부사’



거스 히딩크의 출발점은 한국 축구에 대한 냉정한 현실 파악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국 축구의 고질적 병폐인 불안한 수비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포백 시스템을 도입하고, 선수들의 포지션을 이리저리 바꾸는 등 당장의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실험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또한 히딩크는 한정된 자원의 효율성을 최대화하는 경제 논리에 충실했다. 가능성 있는 선수가 눈에 띄면 과감하게 발탁해, 거의 모든 국가 대표급 자원을 총동원해 능력을 재보았다. 치열한 내부 경쟁 속에서 그의 눈에 들지 않으면 제아무리 국민의 스타라 해도 가차없이 탈락시켰다.



수비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체력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우리 선수들을 90분간 줄기차게 그라운드를 누빌 수 있는 강하고 빠른 선수로 조련했다. 최종적으로 ‘비밀 훈련’을 통해 세트 플레이에 집중했다. 그의 한국 축구 재건 프로그램은 지난 1년5개월 동안 스위스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논평이 있었지만 그에 개의치 않고 소신껏 밀어붙인 히딩크는 마침내 해답을 찾은 듯하다.



그는 냉정한 현실 판단에 기초를 둔 분명한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으며, 단기간의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월드컵 본선이라는 목표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접근했다. 평가전은 지는 한이 있더라도 약한 팀보다 강한 팀과 맞붙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그는 확실한 비전을 세우고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앞으로 하루에 1%씩 전력이 상승할 것”이라는 그의 말은 한국 정치인들이 입버릇처럼 내놓은 허황한 구호가 아니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일관되게 지지하는 국민의 성숙이 그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새삼, 지도자 한 사람이 팀 컬러를 이렇게 바꾸어놓을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한다. 달라진 한국 축구는 앞으로 한 달 동안 국민을 열광케 만들 것이다. 그 함성 속에서 우리는 지방 선거를 치르고, 월드컵이 끝나면 대통령 아들들 문제로 다시 시끌시끌한 나날을 보낼 것이다. 12월에는 국가의 지도자를 선출한다. 그깟 축구 경기 하나에도 이렇게 기뻐하며 얼싸안고 눈물 흘리는 국민들인데, 과연 감동적인 정치를 펼쳐 줄 지도자는 누구일까. 히딩크에게 배울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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