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일본 그리고 한국
  • 박순철 (언론인) (scp2020@yahoo.com)
  • 승인 2002.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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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현실 세계를 단순 명료하게 이해하는 데는 시각적인 모델이 유용하다. 이른바 ‘나는 기러기 떼 이론’의 수묵화적인 이미지도 그렇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겪어 온 산업·무역 구조 변화와 경제 발전의 다중 궤적에는 V자 형태를 이루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런 다이내믹한 변화의 이미지를 단지 경제의 세계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다. 변화가 세상사의 근본 원리라고 한다면 인간사의 모든 영역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닮은꼴 변화의 궤적이 그려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번 월드컵 대회에서 확인되듯이 축구의 세계라고 다를 바가 없다.


나는 1년 전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히딩크 감독을 취재하러 한국에 들렀던 네덜란드의 사진 기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와 아내는 직장에 매이기 싫어 번갈아 가며 임시직으로 일한다고 했다. 한국 축구가 네덜란드 축구를 뒤따르듯 한국의 노동 풍속도도 점차 이 나라를 닮아 갈 것이다.


그런데 네덜란드와 한국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이미지 속에 묘사할 수 있는, 축구보다 훨씬 심각한 화제(畵題)가 있다. 환경 문제다.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드는 데서 이 낮은 땅의 나라는 세계의 선두 주자였다. 70년 전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를 쌓았다. 21세기 초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를 쌓고 있다.


두 나라는 모두 땅은 좁고 인구는 많다. 방조제를 쌓아 담수호를 만들고 그 안에 내부 제방을 쌓는 이른바 ‘복식 제방’이, 땅을 얻겠다는 비원과 식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일거에 해결하는 비책으로 보일 만도 한 처지이다.


비좁은 땅에 인구가 몰려 사는 또 하나의 나라 일본에서 똑같은 방식의 해법이 시도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해서 바다를 막아 큰 땅을 만들려는 공사가 네덜란드의 조이더 바다, 일본의 이사하야 만, 그리고 한국의 새만금에서 차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세 곳의 현장은 같은 이데올로기, 같은 발상의 산물이다. 과거 일본을 방문했던 네덜란드 총리는 이사하야 만 간척사업에서 20년 전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던 일의 복사판을 보았고, 2년 전 한국을 찾았던 일본의 환경운동가 야마시타 히로부미 씨는 새만금 사업의 원형이 이사하야 만 간척이라고 지적했다.


발상이 같으니 후유증도 같을 수밖에 없다. 바다 물길이 끊기고 조이더 바다가 아이젤 호수로 이름이 달라진 뒤 네덜란드 사람들은 단계적으로 호수를 메워 갔다. 그러나 매립 계획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렀을 때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그동안 땅의 가치는 떨어지고 습지의 가치는 올라갔기 때문이다


조이더 바다와 이사하야 만은 새만금의 미래


이런 ‘가치 역전’은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사하야 만의 경우 1999년 방조제 공사가 끝났지만 바다를 막아 큰 땅을 얻겠다는, 이 오래된 구상에 대한 반발은 날로 거세어져 가고 있다. 농토보다 개펄의 원형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수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가치관의 변화가 특정 국가들의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임금이 높아지면 노동공급곡선이 뒤로 꺾이듯이 소득이 올라가면 농토보다 습지를 선택하는 선호의 선회현상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다. ‘간척의 시대’는 가고 ‘역(逆)간척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 사회라고 다를 리가 없다. 우리의 소비 생활이 구미를 닮아 가듯 환경에 대한 선호도 비슷한 궤적을 그려 가리라고 가정해야 옳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다 쌓아 놓은 방조제를 다시 뜯어내라고 하는, 그렇게 해서라도 개펄을 다시 살려내자고 하는 사회적 압력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질 날이 찾아올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오래 전에 콘크리트 더미 속에 매장했던 청계천을 복원하자는 데까지 나아갔다.


조이더 바다와 이사하야 만은 새만금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수정 구슬이다. 지방자치를 새로 이끌어 갈 많은 사람들의 낡은 생각이 걱정된다.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이끄는’ 사회가 얼마나 더 계속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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