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평-김영진 · 심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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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2.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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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소녀백서
자본주의 겨냥한
심통 사나운 풍자-김영진



<판타스틱 소녀 백서>는 언더그라운드 만화의 고전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고스트 월드’라는 원제 그대로 소비자본주의의 망령에 홀린 인간들만이 멍청히 배회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다. 왁자지껄 웃기면서 유혹하는 영화가 아니라 심통 사나운 유머로 보는 사람의 부아를 건드리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전개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단짝 이니드와 레베카는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며 세상 사람들을 비웃는 것이 취미이다. 매사에 심드렁하고 세상이 온통 재수 없는 것들 투성이인 이 두 여자애는 세상의 질서에 들어서기를 망설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세상과 맞서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누구도 이들을 미워할 수 없다. 진짜가 아닌 가짜의 가치에 휘둘리고 그게 무슨 자랑인 양 의기양양한,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허영에 파묻힌 대다수 사람의 허위의식에 이 아이들이 침을 뱉고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마련하고 독립할 준비를 하는 레베카와 달리 이니드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낙제한 과목의 학점을 따기 위해 여름 학기 재수강을 하며 어른이 되기를 미루던 이니드는 오래된 레코드판과 포스터를 모으는 것이 삶의 유일한 즐거움인 괴짜 중년 남자 시모어에게 연정을 품는다. 광고가 선전하는 최신 유행에 기대는 소비 사회의 생활 양식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저항하는 시모어는 이니드가 유일하게 공감하는 사람이다. 최신 것을 존경하는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니드와 시모어 둘 다 오리지널이 주는 쾌감, 신상품의 질서에서 누락된 오래된 물건이 증거하는 세월의 풍상을 만끽하는 쾌감에 취해 있다.


<판타스틱 소녀 백서>의 결말은 흔한 해피엔딩이 아니면서도 상쾌함을 안겨준다. 이니드와 시모어 모두 자폐적인 냉소주의자의 삶에서 살며시 한 발짝 빠져 나와, 확실한 방향을 정해두지 않은 채로 다른 한 발을 사뿐히 앞으로 내딛는다. 시모어가 레코드판과 포스터를 모으고 이니드가 세상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대신 그들의 모습을 스케치북에 담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담을 쌓고 자기만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유령의 세상을 사는 대다수 인간들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기를 바란다. 그것은 가짜이고 착각이다. <판타스틱 소녀 백서>의 이니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진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최소한 그녀는 진짜를 조금 더 기다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 맹랑한 여자아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세상 등진 소녀의
엽기 발랄 유머-심영섭



세상을 등진 뚱한 소녀의 성장담은 이제 10대 영화의 유행이 된 듯하다. 요즘 나오는 10대 영화 속의 아이들은 < If > 니 <이유 없는 반항>이니 하는 영화에서처럼 격렬하게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시시껄렁하게 여기며 매사에 뚱하다. 그러나 <판타스틱 소녀 백서>는 이런 새로울 것 없는 10대 소녀의 성장담에 1950년대 미국 문화의 싱싱한 기운을 접목해 의외의 엽기 발랄함을 얻어낸다. 영화는 어른들이 10대에게 제공하는 사탕발림 같은 자유에 대한 풍자로 그득하다.


영화 초반부터 흘러나오는 1950년대 할리우드 음악이나 스킵 제임스·라이오넬 벨라스코의 블루스는 78회전 레코드 마니아라는 감독 테리 지고프의 문화적 취향을 마음껏 드러낸다. 이 음악은 또한 주인공 이니드의 내면 세계를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변신한다. 원제목인 ‘고스트 월드’처럼 현재의 미국은 고유한 문화가 사라져가는 무개성의 나라이고, 목적 없이 떠도는 유령 같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1950년대 문화에 대한 취향이란 복고라기보다는 일탈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유령 세상이 이니드는 싫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친구 레베카와 구애 광고를 보고 장난 전화를 걸고, 옆집 사람을 미행하고, 동년배 남자아이를 골려주는 낙으로 산다. 어쩌면 좋은 것을 싫다고 표현하는 이니드의 반동 형성적인 행동은 감정적인 의사 소통이 전혀 안 되는 주류 세계를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장난이자 저항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역시 세상과 단절된 채 LP 레코드를 수집하는 중년 남자 시모어 (스티브 부세미가 마치 시모어 그 자신인 양 열연한다)에게 일종의 동지적 연대감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테리 지고프는 이 지점에서 나이도 성격도 판이하지만 단지 문화적 취향이라는 공통분모만으로 서로에게 빠져드는 이 이상한 커플을 통해, 세상과의 의사 소통에 목말라할수록 더욱더 움츠리는 이 세상 모든 아웃사이더들의 쓸쓸한 뒷모습을 언뜻 비추어 준다. 한 소녀의 내면을 요지경의 만화처럼 그려내는 영화는 성장 영화의 관습을 뛰어넘어 잰 체하면서도 속물스런 주류 문화에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삐딱하면서도 사랑스러움이 공존하는 <판타스틱 소녀 백서>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며 명랑 엽기 소녀의 기행에 낄낄대다가도 문득 깨달았던 것은, 여전한 미국 독립영화의 저력과, 얄밉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는 미국 하부 문화의 다양한 기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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