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은 소설광이었다?
  • 강철주 편집위원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2.12.0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탁환 지음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이순신·허 균·황진이 등을 내세워 조선 시대를 소설로 복원하는 작업에 전념해 온 작가 김탁환이 장희빈과 서포 김만중을 등장시켜 새로 상재한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동방미디어 펴냄)은 일단 정치 소설로 읽힌다. 각각 남인과 서인 세력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사씨남정기>를 둘러싸고 벌이는 대결이 작품의 외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에 따르면, <사씨남정기>는 처첩 간의 갈등을 다룬 가정 소설이 아니다. 서포는 <사씨남정기>를 통해 장희빈과 그 일당의 악행을 세상에 널리 알림으로써 인현왕후와 서인 세력 복귀를 꾀한다. 반면, 그같은 서포의 의도를 간파한 장희빈은 <사씨남정기>가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탈취하여 그를 빌미로 서인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독자들의 흥미를 끌 만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의 진면목은 정치 소설의 외피 속에 ‘소설에 대한 소설’을 감추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 작품에는, 그 중심에 <사씨남정기>가 놓여 있다는 점말고도, 숙종 치하 17세기 조선 사회에서 크게 유행했던 필사본 소설이 어떻게 생성되고 유통되었는지가 충실하게 재현되어 있다. 작가는 매설가(賣說家:소설가) ‘모독’을 비롯해 김만중·조성기(<창선감의록> 작가) 같은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17세기 당대의 소설 문단을 ‘비판적’으로 개괄하는가 하면, 소설가로서 자의식도 표나게 드러낸다.



이른바 세책방(貰冊房)에 대한 꼼꼼한 묘사도 흥미롭다. 가령 장희빈이 아직 장옥정이던 시절 끼니를 거르며 모은 쌀로 책을 빌려 읽는 장면이 그렇다. 그녀는 궁중에 들어가서도 오빠 장희재를 통해 시중의 소설을 열심히 구해 읽는 마니아로 그려지는데, 그렇게 구해 읽은 소설들 가운데 궁중과 사대부 가문 여성들에게 널리 읽힐 만한 ‘좋은’ 작품을 가려 뽑아 궁녀들에게 베껴 쓰도록 한다. 한글 장편소설이 주종을 이루는 ‘낙선재 문고’가 형성된 과정을 추론할 단서가 발견되는 대목이다.
어떤 책이 언제 나왔다는 저술 연대기에 비해 소홀히 다루어지던 독서 풍속사를 본격적으로 소설화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책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