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의 기억
  • 이명호(가톨릭대 강의 전임 교수·영문학) ()
  • 승인 2004.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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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를 제대로 애도하는 길은 개발과 효율의 신화에 눌려 오랜 세월 마비되어온 우리들의 윤리적 감각을 회복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이 회복은 그의 시대에 죽어간 원혼들의 부름에 응답하는 길이다.”
유신 시대의 정체성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들을 보면 우리는 여전히 죽은 자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은 자는 살아 있는 자들이 적절한 상징적 기억을 부여해 주고 제대로 된 장례 의식을 치러주기 전에는 반드시 현세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장례 의식이란 죽은 자에게 거대한 기념비를 세워주거나 일방적 비난을 늘어놓기 위해 치르는 의식이 아니다. 영광은 영광대로 수치는 수치대로 그의 삶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평가해서 정당한 사회적 기억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장례 의식이다.

오늘날 우리가 박정희라는 이름의 유령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그를 잠재울 애도의 의식을 지금까지 제대로 거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죽은 자에 대한 살아 있는 자들의 기억은 무성하다. 서로 충돌하는 다양한 기억 담론들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 공유할 만한 기억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죽은 자에 대해 합의된 기억을 끌어내기 어려운 까닭은 죽은 자가 홀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유령은 그의 시대에 죽어간 다른 많은 유령들과 함께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최근 사인을 밝혀낸 최종길 교수의 원혼이나 박정희 시대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수많은 넋들 역시 우리에게 합당한 기억의 제의를 요구하고 있다. 죽어서도 한 자리에 앉지 못하는 이 복수의 유령들 중에서 우리는 ‘누구’의 호소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이 물음에 답하는 곳에서 살아 있는 자들의 역사적·윤리적 책임이 시작된다.

엠마뉘엘 레비나스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타자의 부름에 대한 ‘응답(responding)’에서 주체의 ‘책임(responsibility)’을 찾았다. 살려 달라는 타자의 애절한 호소를 무시하고 타자와의 응답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괴할 때 살인이 일어나며, 배고픈 어린아이의 호소를 외면할 때 도덕적 불감증과 냉담이 일어난다.

물론 모든 호소에 응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 한계이다. 하나의 호소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다른 호소에 응하는 일을 포기해야 할 때가 많다. 응답 가능한 범위와 우선 순위를 정하는 것이 한 사람의, 혹은 한 사회의 윤리적 성격을 결정한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매일 수많은 호소와 절규를 듣고 있고 응답 가능성으로서 책임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 행복을 위해 타자의 절규 외면하지 않았는가

박정희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압축적 근대화 기간에, 한국 사회는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기보다는 그것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데 더 주력해왔다. 경제 동물적 감각의 극대화와 윤리적 감각의 극소화라 이름붙일 수 있는 기형적 모습이 우리들의 초상화였다. 나와 내 가족과 내 민족의 행복을 위해 타자의 절규를 외면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 되었다.

그 외면 행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유신 시대 극복을 외치는 노무현 대통령이 국익을 위해 파병을 강행함으로써 박정희를 반복하고 있는 모습에서, 살려 달라는 김선일씨의 절규에 파병 철회 불가 방침으로 응답한 정부의 태도에서, 그의 참수 동영상을 유포하며 죽음의 고통을 감각적 쾌락으로 소비하는 쾌락주의에서, 아니 이 모든 것들을 묵인한 우리들의 위선과 공모에서 그 ‘외면’은 되풀이되고 있다.

박정희 시대를 제대로 애도하는 길은 과도하게 기억된 개발과 효율의 신화에 눌려 오랜 세월 마비되어온 우리들의 윤리적 감각을 회복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이 회복은 그의 시대에 죽어간 수많은 원혼들의 부름에 응답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들의 절규에 응답하지 않는 한 유신 시대는 종료되지 않고, 죽은 자들과 우리의 관계도 끝나지 않는다. ‘외면’이 되풀이되는 한, 그리고 윤리적 감각의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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