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부터 살려라
  • 유승삼 (언론인·KAIST 교수) ()
  • 승인 2004.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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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경제 문제가 가장 시급한데 이 정권은 그저 국가보안법이니 과거사 규명이니 하는 정치 문제에만 몰두하고 있다.’

요즘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 진영은 이런 주장으로 국보법 폐지나 과거사 진상 규명을 막으려 한다. 중소기업과 서민 살림살이가 어려운 것은 분명한 사실이어서 이런 주장은 꽤 호소력 있게 번지고 있다. 그러나 언뜻 타당한 지적 같지만 실은 지극히 비논리적인 정치 선동일 뿐이다. 경제 문제가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일은 모두 뒤로 미루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 문제는 경제 문제대로, 국보법 문제는 국보법 문제대로, 과거사 진상 규명은 또 그것대로, 동시에 얼마든지 병행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국보법 폐지 주장을 좌파의 공세라고 낙인 찍는 것도 터무니없다. 그러면 이미 오래 전부터 국보법 폐지를 희망해온 미국 국무부는 좌파 기관, 주한 미국 대사는 좌파 인사가 되고 만다. 국보법 폐지 문제는 민주냐 반민주냐, 인권이냐 반인권이냐 하는 문제이지 결코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실질적인 권력은 수구·보수 세력이 쥐고 있다

현정권이 사회주의로 가고 있다는 박근혜 대표의 주장이나 우리 사회가 좌파에 장악이나 된 듯이 몰아치는 보수 인사들의 주장도 터무니없는 매카시즘적 공세이다. 현정권은 어느 모로 보나 중도 우파이다. 사회 부문에서 이따금 진보적 시각이 엿보일 때도 있었지만 정권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경제 정책을 보면 좌파는커녕 오히려 신자유주의에 가깝다. 현정권을 좌파로 인식하는 것은 우 편향에서 오는 착시 현상이다.

실은 노무현 정권은 사회 전반은 물론 국가 조직조차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처지이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최근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과 대법원의 폐지 반대 의견에서 보듯 사법부 상층부는 여전히 보수층이 장악하고 있다. 국회도 여당이 간신히 과반수를 확보하고는 있지만 ‘장악’은 꿈도 꾸기 어려운 형편이다. 행정부마저 미군기지 이전 협상 과정에서 대통령을 ‘왕따’시켰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정권의 손 밖에서 놀고 있다. 그뿐인가. 거대 보수 신문은 매일같이 마음대로 대통령을 난타한다. 극우 인사들은 막 대놓고 욕을 하고 심지어 쿠데타까지 공개적으로 선동하고 있다.

이를 놓고 보면 누가 뭐래도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정부 수립 이래 권력을 누려온 기득권층, 수구·보수 세력의 손에 있음이 분명하다. 현정권은 기껏해야 청와대와 국회 일부를 장악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런 정도의 권력 분점에도 보수층이 그처럼 반발하는 것은 오랜 독점이 깨진 것을 참지 못하는 일종의 금단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경제 발전과 정치·사회적 개혁이 선후 문제는 아니지만 서로가 유기적인 연관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개혁은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그 경제적 토대가 마련되고 광범위한 지지층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다른 나라의 민주화 과정이 일러 주고 있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사회적 분위기는 충분히 무르익어 있다. 다만 계속되는 불경기로 경제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게다가 개혁의 주된 지지층이라 할 중산층과 서민층이 가장 큰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어 개혁의 지지 기반이 극히 취약하다.

그렇다면 외환위기 이후 계속 희생자가 되어온 중산층 이하 계층을 살릴 응급 대책을 서둘러 개혁의 경제적 토대와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 당면한 정책 과제이다. 반짝 효과를 추구하기보다 경제의 근본 구조 개혁을 추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올바른 자세이다. 그러나 응급 환자에게는 그에 맞는 대증 요법이 우선 필요한 법이다. 병의 근본을 다스리는 것은 응급처치 후에 할 일이다.

경제난 속에서도 국민은 차기 정부 역시 ‘보수·안정적’(35.7%)이기보다는 ‘진보·개혁적’(56.9%)이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만큼 변화와 개혁에 대한 국민의 요구는 확고하다. 이 소중한 열망을 키워 나가야 한다.

서민부터 살려라. 우직스럽게 긴 시간이 필요한 구조 개혁에만 매달리다가 개혁의 지지 기반을 잃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모든 정치·사회 개혁이 물거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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