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과 광기의 미국
  •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 ()
  • 승인 2004.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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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진보개혁파는 부시가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의 뜻이 아닌 대법원 판결로 백악관을 차지했다고 비아냥대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 근본주의 신도들은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다시 말해 부시
미국 대통령 선거가 피 말리는 접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공화당 전당대회 직후인 9월 초부터 5~11% 포인트의 여유 있는 리드를 지켰던 부시 대통령이 9월30일 열린 첫 TV 토론을 망치면서 예측 불허의 혼전이 벌어지고 있다. 여론조사 기관마다 승자가 다르게 조사될 정도다.

하지만 국제 여론은 사뭇 다르다. 최근 한 국제 여론조사에서는 35개 국가 중 30개 국가 국민들이 민주당 존 케리 후보가 당선되기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민심과 국제 사회의 여론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9·11 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대외정책이 이러한 차이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부시의 막가파식 대외정책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은 물론 9·11 테러의 영향이다. 내 나라 안에서, 내 앞에서 가족과 친구 들이 죽어가는 것을 본 미국 국민은 ‘테러를 막기 위해서’라는 부시 행정부의 명분을 거부하기 어려운 심리 상태에 있다. 테러를 막기 위한 것이라면 어떤 정책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또 다른 요인도 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이다. 미국 공영 방송 PBS의 시사 다큐멘터리 진행자이며 원로 언론인인 빌 모이어스는 지난 9월11일 뉴욕에서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통해 오늘의 세계에서 환영(幻影)과 광기는 더 이상 주변적 존재가 아니라 점차 중심적 힘이 되어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베슬란에서 3백명 넘는 어린이의 목숨을 앗아간 체첸 반군의 인질극,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등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자살 폭탄 테러, 3년 전 뉴욕 세계무역센터 등을 겨냥한 항공기 테러 등은 모두 환영과 광기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조차도 이러한 환영과 광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그는 지적한다. 기독교 근본주의가 그것이다.

예컨대 지금 텍사스 주 등 미국 남부의 이른바 바이블 벨트에서는 예수의 재림을 예언한 열두 권짜리 책이 불티 나게 팔리고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란 한마디로 말해 성서에 씌어 있는 것을 말 그대로 믿는 것을 말한다. 창조론이 대표적이다. 나아가 이들은 예수의 재림을 확신한다.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지구 최후의 대결전(아마겟돈)이 벌어지며 그때 예수가 재림한다. 그리고 진정한 신자만이 예수를 따라 하늘 나라로 올라가고(휴거) 나머지는 지옥불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일정한 조건이란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이 국가를 세우고, 나아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성서의 땅’ 모두를 점령하며, 이에 저항해 반(反) 그리스도 세력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이다. 따라서 근본주의를 믿는 신도들에게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는 외교정책 문제가 아니다. 예수의 재림을 앞당기는 종교적 시나리오이자 영혼 구원과 관련된 중차대한 신앙 문제이다.

이슬람의 광기보다 미국의 환영이 더 무섭다

미국의 진보개혁파는 부시가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의 뜻이 아닌 대법원 판결로 백악관을 차지했다고 비아냥대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 근본주의 신도들은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다시 말해 부시 대통령은 하나님의 대리인인 것이다.

빌 모이어스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샤론 이스라엘 총리의 팔레스타인 강경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가 미국 내 기독교 신자들로부터 항의 e메일을 수십만 통 받았다고 한다. 그 이후 샤론이 어떤 짓을 하든 부시는 표가 떨어질까 봐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유권자 중 근본주의 신자들은 얼마나 될까. 모이어스에 따르면 15% 정도다. 또 시사 주간지 <뉴스 위크>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17%가 자신의 당대에 예수가 재림할 것을 믿고 있다.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미국 공화당이 인간 배아 줄기세포 연구를 금지하고, 동성애자 결혼을 불법화하며, 낙태에 반대하는 것은 사실 이 확실한 표밭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빌 모이어스가 지적한 대로 오늘의 세계가 환영과 광기에 의한 힘의 대결로 치닫는다면 그것은 대단히 우려할 만한 일이다. 이들에게는 사실에 근거한 대화와 토론이 먹혀들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슬람의 광기보다는 미국의 환영이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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