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의 ‘허풍’
  • 김영하(소설가) ()
  • 승인 2004.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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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과 LG는 저 앞에 있는데 문학이나 영화, 음악은 저 뒤에서 못난 친척처럼 쭈뼛거리고 있다. 돈은 많은데 폼은 안 나는 이 비극을 해소하기 위해 당연히 돈이 투입된다. 그런데 돈만으로는 그 갭이 해소되지 않
 
근대 역사를 돌아보면 보통은 한 나라의 경제와 문화가, 썰매를 끄는 개들처럼 비슷한 정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전하고 성숙한다. 프랑스는 혁명과 그에 뒤이은 근대의 여명기에 걸출한 작가들을 배출했다. 양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열강의 반열에 오른 나라들, 예컨대 일본이나 독일, 러시아 같은 나라들은 경제력에 걸맞거나 혹은 그를 뛰어넘는 문화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라든가 도스토예프스키라든가 헤르만 헤세라든가 하는 이름들이 쉽게 떠오른다. 경제가 융성하면 시장이 생긴다. 예술품 역시 시장에서 거래된다. 거래가 활발해지면 예술가들이 몰려든다. 피렌체나 암스테르담, 파리, 뉴욕 등 당대의 가장 활발한 시장에서 가장 다양한 예술이 꽃핀 것도 우연은 아니다. 반대로 시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현대적 예술은 난망이다.

그런데 경제는 가끔 특별한 계기를 맞아 융성하는 경우가 있다. 중세의 피사나 현대의 싱가포르처럼 세계 정세의 변화로 무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든지 하는 경우가 그러할 것이다. 상인과 정치가들이 만들어낸 그 특수한 급속발전기에 문화는 상대적으로 지체되어 보인다. 그러면 그 나라나 도시의 구성원들은 외부로부터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돈만 아는 동물’이라는 비난을 듣거나 ‘문화를 모른다’는 경멸을 당하기도 한다.

‘문화 개발 5개년 계획’ 편다고 괴테가 나오나

좋은 집을 사면 거기에 걸 그림을 찾듯 벼락부자가 된 나라들은 문화도 자신들의 경제적 번영에 걸맞게 급속히 발전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남아도는 돈으로 문화진흥책을 시작한다. 예술가들에게 돈을 뿌리고 예술 시장을 급조한다. 문제는 문화가 경제처럼 집중적 노력으로 단기간에 발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식의 발상은 그야말로 불도저와 굴착기를 위한 것이다. ‘5개년 계획’으로 라파엘이나 셰익스피어, 괴테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나라는 개인당 소득으로는 그저 그렇지만 무역량이나 전체 경제 규모로는 세계 10위권이다. 이렇게 급속도로 성장한 나라가 거의 없다 보니 경제와 문화의 갭도 다른 어떤 나라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격차를 보이고 있다. 열심히 달려오다가 돌아보니 문화는 까마득히 먼 곳에서 허겁지겁 뒤따라오고 있는 격이다. 삼성과 LG는 저 앞에 있는데 문학이나 영화, 음악은 저 뒤에서 못난 친척처럼 쭈뼛거리고 있다. 돈은 많은데 폼은 안 나는 이 비극을 해소하기 위해 당연히 돈이 투입된다. 문학 작품 번역에, 영화 진흥에, 전통예술 보존에 국가의 예산이 투입된다. 그런데 돈과 계획만으로는 그 갭을 메울 수가 없다.

‘떵떵거리며 잘사는데 남들한테는 무시당하는’ 이 고통을 진통하기 위해서는 허위 의식이 필요하다. 그 허위 의식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리 문화도 남 못지않다. 그러나 그동안 못 살았기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해외에 소개되기만 한다면 너희들도 놀라 나자빠질 것이다.’ 물론 이런 의식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우리 문화에는 분명 매력적인 데가 있다. 그러나 모두가 ‘놀라 나자빠질’ 정도로 대단한 걸 감추고 있다는 것도 진실은 아닌 것 같다.

전통 문화야 어느 나라가 낫다 아니다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치자. 그러나 문학이나 영화는 다른 나라의 그것과 쉽게 비교된다. 근대 문학이 시작된 건 불과 100년 전이고, 그나마도 그 사이에 일제강점기·한국전쟁·독재의 시대를 거쳤다. 세계 문학의 주류는 장편소설이지만 우리는 단편소설 중심의 문학 전통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내놓을 만한 장편이 별로 없다. 있었다면 흥미로운 작품들을 찾아 전세계를 헤매는 출판업자들이 벌써 찾아 출간했을 것이다. ‘물건은 많은데 번역이 안돼서’는 노벨상 시즌용의 오래된 허풍 혹은 자기 위안에 속한다. ‘물건’은 정말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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